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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이 가지고 있지만 미술관 것이 아닌 그림 - 신학철 「모내기」 압수 3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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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결문·유엔 문서·국회 기록으로 다시 읽다

그림을 감정한 사람

 

1998년 3월 13일, 대법원 제3부는 유화 한 점을 이렇게 읽었다. 그림 상반부는 북한이며, 나무숲 오른쪽 아래에 그려진 산은 북한에서 '혁명의 성산'으로 일컬어지는 백두산이고, 꽃이 만발한 곳의 초가집은 김일성 생가를 암시한다. 그 아래에서 농민들이 오곡과 풍년을 경축하며 춤을 추는 장면은 결과적으로 북한을 찬양하는 내용이다. 그림 하반부는 남한이고, 농부가 황소로 써래질을 하며 이티(E.T)와 람보와 양담배와 코카콜라와 레이건과 나카소네와 전두환을 남해 바다로 쓸어버린다. 이 장면은 피지배계급이 지배계급을 타도하는 민중민주주의 혁명을 일으켜 연방제 통일을 실현한다는 북한 공산집단의 주장과 궤를 같이한다.

 

결론은 한 문장이었다. 이 그림은 "반국가단체인 북한 공산집단의 활동에 동조하는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표현물"이다.

 

이 판독이 어디서 왔는지, 지금은 알 수 있다. 유엔 자유권규약위원회가 2004년에 채택한 결정문에 반대신문 결과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반대신문에서 드러난 바에 따르면, 그 감정인은 전직 북한 공작원이자 전직 그림 교사였으며 미술에 관한 그 이상의 전문적 식견은 없었다. 그는 경찰청 대공전술연구소에 고용되어 있었고, 그의 직무는 국가보안법 사건의 경찰 수사를 돕는 것이었다."

 

결정문 3.3항은 그가 무엇을 말했는지도 적어두었다. 그림이 사회주의 리얼리즘 이론을 따르며 계급투쟁을 묘사한다는 것, 그림 속 산이 북한이 주도하는 혁명을 상징한다는 것, 집의 형태가 김일성 생가를 반영한다는 것. 대법원 판결문에 적힌 백두산과 초가집의 의미가 여기서 나왔고, 이 감정인의 이름은 홍종수로 확인된다.

 

그림을 그린 사람은 다른 이야기를 했다. 2008년 한국일보 인터뷰에서 신학철은 웃으며 말했다.

 

"우리 동네 노란 초가집을 그린 건 또 김일성 생가라 이거예요. 또 살구꽃도 진달래라는 거예요. '그래, 진달래가 이렇게 크냐'고 따졌더니 그 다음부터 그 얘기는 빼두만. 꽃이 지붕 위까지 올라가니까."

 

그가 그린 이상향은 경북 김천, 자기가 자란 마을이었다. "보리밭이 파란데 동네 집집마다 살구꽃이 활짝 펴 있고, 그것이 서울로 대학 가서 생각해보니까 하나의 꿈 같고 그러어요."

 

전직 공작원 한 사람의 판독과 화가 한 사람의 설명이 법정에서 맞붙었고, 대법원은 전자를 택했다. 그 결과로 「모내기」는 1989년 8월 17일 새벽에 압수된 뒤 지금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37년째다.

 

1987년 여름의 그림

 

신학철은 1943년 12월 12일 경북 금릉군 감문면에서 태어났고, 홍익대 서양화과를 1964년에 들어가 1968년에 나왔으며, 1974년부터 서울 관악구 남강고등학교에서 미술을 가르쳤다. 1986년 2월 민족미술협의회에 가입했고, 이듬해 3월 공동대표가 됐다. 여기까지는 대법원 판결문이 인정한 사실이다.

 

「모내기」는 1986년 7월 20일에 시작해 한 번 멈췄다가 1987년 6월에 다시 붓을 들어 그해 8월 10일에 완성됐다. 캔버스에 유채, 130.3×160.2센티미터. 완성 직후인 8월 중순 민족미술협의회가 연 제2회 통일전에 나갔고, 장소는 그림마당 민이었다.

 

 

이 그림이 널리 퍼진 경로는 두 갈래이고, 1988년 10월경 민미협이 만든 1989년도 달력에 실렸고, 1989년에는 인천의 한 단체가 부채에 인쇄했다. 부채를 들고 다니던 명지대 총학생회 학생이 먼저 구속됐고, 신학철은 그 뒤에 잡혀갔다.

 

"먹고 살아야 되니까 선생을 했는데, 그림 그리느라 전력투구가 안 됐으니까. 그래서 전업작가를 한다고 그만뒀는데, 그 이듬해인가 모내기 사건이 났죠. 조금 그려볼까 했는데 그렇게 된 거예요."

 

그림은 체포와 같은 날인 1989년 8월 17일에 압수됐고, 기소는 9월 29일이었다. 구치소에서 석 달을 보내고, 보석으로 나왔다.

 

완성부터 압수까지 두 해가 걸렸고, 통일전에 걸렸을 때는 아무 일도 없었으며, 문제가 된 것은 그림이 달력과 부채로 복제돼 퍼진 뒤였고, 먼저 구속된 사람도 그림을 그린 사람이 아니라 그 부채를 들고 다니던 학생이었다.

 

두 번의 무죄

 

1심은 무죄였고, 서울형사지방법원 89고단7174, 1992년 11월 12일 선고였으며, 재판이 시작되고 3년 넘게 걸렸다. 2심도 무죄였고, 서울형사지방법원 93노7620, 1994년 11월 16일 검사 항소기각이었다.

 

항소심 재판부는 미술품의 이적성을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지 네 가지 원칙을 세웠다. 대법원 판결문에 요약되어 남아 있는 그 원문은 이렇다.

 

"첫째 그림이 표현하는 사상이나 이념이 이적성이 있는지 여부를 판단함에 있어서는 그 시대의 상황에 있어서 사회일반인이 갖는 건전한 상식과 보편적인 정서에 기초하여 그림을 해석하여야 할 것이고, 둘째 미술품이 실정법위반인지 여부를 판단함에 있어서는 획일적, 일의적으로 해석하지 않도록 매우 신중하고 섬세하여야 하며, 셋째 회화의 이적성 여부를 판단함에 있어 어떤 특정부분을 전체 그림에서 분리하여 독립적으로 해석하여 그것이 이적성을 띠는 것인가 여부를 판단하여서는 아니되고 각개의 구성 부분은 주제의식을 드러내기 위해서 작품전체의 구성과 관련하여 어떠한 역할을 하는가 하는 관점에서 해석되어야 하고, 넷째 헌법 제22조 제1항에서 예술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으므로 그 제한 법규는 가능한 한 한정적으로 엄격하게 축소해석하여야 할 것"

 

그림의 한 부분을 떼어내 그것만 보고 판단하지 말라는 셋째 원칙이 핵심이다. 두 재판부가 읽은 「모내기」는 이런 그림이었다. "전체적으로 원작자가 표현하고자 하는 바대로 통일에 장애가 되는 요소로서의 외세와 저질외래문화를 배척하고 우리 사회를 민주화하여 자주적, 평화적 통일로 나가야 한다는 조국통일에의 의지 및 염원을 나타낸 것"이고, 상반부는 "통일이 주는 기쁨과 통일 후의 평화로운 모습을 이상향으로 묘사"한 것이다.

 

대법원이 그림을 반으로 갈랐다

 

1998년 3월 13일, 대법원 제3부는 원심을 파기했고, 사건번호는 95도117, 주심은 지창권 대법관이었다.

 

대법원은 채증법칙 위배를 파기 사유로 들었고, 실제로 한 일은 그림을 가로로 반 잘라 위는 북한, 아래는 남한으로 읽은 것이었다. 항소심이 하지 말라고 명시한 바로 그 방식이다.

 

이 판독의 출처가 검찰 측 감정인이라는 사실은 앞에서 봤다. 그림 속 산 하나를 떼어 "혁명의 성산"으로 읽고, 초가집 하나를 떼어 김일성 생가로 읽는 방법. 항소심의 셋째 원칙은 이렇게 폐기됐다.

 

대법원은 이적표현물 판단 기준도 세웠고, 표현물의 내용이 "국가의 존립·안전과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협하는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표현"이면 표현의 자유의 한계를 벗어난 것이고, 이적성 여부는 "표현물의 전체적인 내용뿐만 아니라 그 제작의 동기는 물론 표현행위 자체의 태양 및 외부와의 관련사항, 표현행위 당시의 정황 등 제반 사정을 종합"해 결정한다.

 

이 기준은 지금도 살아 있으며, 근거 판례인 1992년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90도2033)에는 반대의견이 붙어 있었고, 이회창·이재성·배만운 대법관은 표현물이 "폭력 기타 비합법적 방법에 의하여 대한민국의 존립·안전과 헌법의 기본질서를 폐지·전복할 것을 유도 또는 선동하는 내용"을 담아야만 불법한 표현물로 볼 수 있다고 썼다. 34년 뒤 제주지방법원이 국가보안법 제7조를 헌법재판소로 보내며 쓴 이유가 사실상 같은 말이다.

 

파기환송심은 서울지방법원 98노2857, 1999년 8월 13일 선고였고, 징역 10월 선고유예와 그림 몰수였다. 재상고심 99도3839가 1999년 11월 26일 상고를 기각하며 확정됐고, 압수부터 확정까지 10년 3개월이 걸렸다.

 

접힌 채 서류봉투에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그림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화가가 여러 번 말했다. "재판시 당국은 증거물인 작품을 두루마리로 말아 절반으로 접어 들고 다녔는데 그림이 파손될 수 있다고 항의하자 나중에는 그림을 차곡차곡 접어 서류 봉투에 넣어갖고 왔습니다. 유화이기 때문에 꺾이면 자국이 나고 심하면 물감이 떨어져 나갑니다."

 

원상회복은 불가능할 것이라고 그는 2004년에 이미 말했고, 2008년에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 100호 그림이 몇 겹으로 접혀서 봉투에가 넣어져 있어요. 유화인데 말이죠." 재판 과정에 관여했던 유홍준은 "PVC 관에라도 넣어서 보관해줄 것을 재판부에 부탁했지만 거절당했다"고 했다.

 

검찰의 입장은 2004년 취재에 그대로 남아 있고, 서울중앙지검 증거물과장은 "몰수품은 그 권리가 국가에 있다. 폐기해도 아무런 이의가 없다"고 했고, 경찰에서 접어서 온 것을 갱지로 말아 보관창고에 두고 있다고 설명했다. 공안2부장은 이렇게 말했다.

 

"기본적으로 몰수된 물품은 국고에 귀속된다. 무가물의 경우 폐기 처분이 원칙이다. 훼손여부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작가가 국가에 작품을 맡겨놓은 것이 아니질 않나."

 

같은 해 작가와 문화예술계가 작품 열람을 신청하자 검찰은 거절했다. 그림이 이적표현물인 만큼 타인에게 보여주는 행위 자체가 국가보안법상 이적표현물 반포죄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민미협의 반박은 사본을 인터넷에서 쉽게 구할 수 있을 만큼 널리 알려진 그림인데 열람조차 거부하는 것은 훼손에 대한 비판을 모면하려는 변명이라는 것이었다.

 

2018년 그림이 국립현대미술관으로 옮겨진 뒤, 미술관 관계자가 상태를 이렇게 전했다. "가로 세로 가운데 부분에 접힌 자국 같은 게 보인다. 아마도 압수물 창고에 접어 보관하는 과정에서 훼손된 것 같다."

 

유엔이 소각을 막았다

 

1999년 11월 유죄가 확정되자 그림은 폐기 절차를 밟을 수 있는 상태가 됐고, 유엔 결정문은 그 상황을 이렇게 적는다. "청구인에 대한 소송이 종결됨으로써, 앞서 압수된 그 그림은 파기될 준비가 되었다."

 

신학철은 2000년 4월 25일 유엔 자유권규약위원회에 개인통보를 냈고, 대리인은 조용환 변호사였다. 2000년 5월 8일, 위원회는 신통보 특별보고관을 통해 절차규칙 제86조에 따라 한국 정부에 잠정조치를 요청했다. 사건이 심리되는 동안 그 그림을 파기하지 말라는 것이었고, 회화의 파기를 막기 위해 이 조항이 발동된 첫 사례다. 견해는 2004년 3월 16일 제80차 회기에서 채택됐고, 문서번호는 CCPR/C/80/D/926/2000이다.

 

"위원회는 앞에 놓인 사실이 규약 제19조 제2항의 위반을 드러낸다고 본다."

 

구제조치는 네 가지였다. 유죄판결에 대한 보상, 유죄판결의 취소, 소송비용, 그리고 하나 더.

 

"나아가 당사국이 그 그림을 통해 표현된 청구인의 표현의 자유에 대한 어떠한 침해도 정당함을 보이지 못하였으므로, 당사국은 필요한 비용을 부담하여 그 그림을 원상 그대로 청구인에게 반환하여야 한다."

 

위원회는 90일 안에 이행 상황을 보고하라고 했고, 한국 정부는 두 문단으로 답했다. 그림은 적법하게 몰수되었으므로 재심이나 보상의 근거가 없으며, 국가보안법 제7조의 정지나 폐지를 약속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 사건에는 반대의견도 개별의견도 붙지 않았고, 위원 전원일치였다. 이후 위원회는 연례보고서에 이 사건의 후속조치를 "대화 진행 중"으로 다섯 해에 걸쳐 기록했고, 이행 여부에 대해 "만족" 또는 "불만족" 판정을 내린 적 없이 22년이 지났다.

 

돌려줄 법적 근거가 없습니다

 

2004년 10월 19일, 「모내기」는 국회 두 상임위에 동시에 등장했고, 법사위 대검찰청 국정감사에서 이은영 의원이 그림 사본을 들고 나와 송광수 검찰총장에게 물었다. 이 그림 한 장이 과연 국가를 위태롭게 하느냐고, 반환할 계획이 있느냐고.

 

회의록에 남은 총장의 답은 세 마디로 요약된다. 그 당시에 폐기처분을 했어야 했다는 것, 돌려줄 수 있는 법적 근거가 없다는 것. 그리고 시대에 따라 예술작품을 보는 시각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회의록은 답변 자리에 말줄임표만 적어두었다.

 

같은 날 문화관광위원회에서는 우상호 의원이 국립현대미술관장 김윤수에게 물었다. 사법당국으로부터 그 그림을 양도받을 뜻이 있느냐고. 관장의 답은 이랬다. "법무부가 위탁관리 의향을 밝혀와 우리가 맡겠다는 의사를 명확히 밝힌 상태." 검찰은 못 준다 하고 미술관은 받겠다고 한 하루였다.

 

13년의 공백

 

그해 국정감사가 남긴 문서가 있다. 국회 문화관광위원회의 「2004년도 국정감사 결과보고서」이고, 감사결과 시정 및 처리요구사항 가운데 국립현대미술관 항목에 이렇게 적혀 있다.

 

"미술관에서 신학철의 '모내기' 작품을 인수하는 방안 강구할 것"

 

정부는 이듬해 2월 국회에 처리결과보고서를 냈다. 65번 항목의 답변 전문이다.

 

"조치결과: 검찰관계자와 비공식적으로 미술관에 기탁 또는 관리전환 하는 것을 협의·제안 하였으나, 현재 검찰측의 입장이 정리되지 않아 진전이 없는 상황임. 향후 추진계획: 검찰측과 지속적으로 협의하여 동 작품을 미술관에 기탁 또는 관리 전환 할 수 있도록 추진할 계획임."

 

지속적으로 협의하는 데 13년이 걸렸고, 2017년 12월 5일 서울중앙지검 공판3부는 반환 거부를 최종 결정했다. 대법원 확정판결로 몰수됐으므로 법원이 재심을 열어 기존 판결을 무효화하지 않는 한 돌려줄 수 없다는 것이다.

 

같은 달 26일 그림이 검찰 창고를 나왔고, 압수된 지 28년 4개월 만인 12월 29일 법무부장관이 국립현대미술관 위탁·보관을 결정했으며, 그때 신학철이 한 말은 이랬다. "아직 몰수상태를 벗어나지 못했지만, 보존여건이 갖춰진 미술관으로 들어와 다행스럽다." 그리고 작품 반환 요구를 계속하겠다고 했다.

 

문화체육관광부의 입장은 짧았다. "여러 논란이 예상되는 만큼, 현재로선 일반에 전시할 계획이 없다."

 

미술관이 가지고 있지만 미술관 것이 아닌

 

지금 「모내기」의 소유자는 서울중앙지방검찰청, 저작권자는 신학철, 보관자는 국립현대미술관으로 셋이 다르고, 그래서 아무도 그 그림을 걸 수 없다.

 

국립현대미술관의 소장품 관리 규정은 이런 물건을 상정하지 않았다. 「정부미술품 운영에 관한 세부시행 규정」은 이런 작품을 미술관 소장품 규정의 적용 대상에서 제외하고, 기탁 관련 조항은 기탁 기간을 자동으로 연장하되, 반환을 요청할 수 있는 사람을 기탁자로 한정한다. 이 경우 기탁자는 검찰이다.

 

미술관이 이 그림을 부르는 이름은 "보관위탁"인데, 이 용어는 어느 규정에도 정의되어 있지 않다.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 데이터베이스에서 「모내기」는 검색되지 않고, 정부미술은행에도 없으며, 미술관 연보 2018년부터 2024년까지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8년 7개월 동안 이 그림에 관한 점검 결과가 공표된 적은 없다.

 

 

2017년 12월 이 그림을 특종 보도한 기자는 이렇게 썼다. "법적으로 몰수상태여서 전시를 할 수 없는 기묘한 소장품이 되는 셈이다." 국가가 소유하고, 국립미술관이 보관하며, 작가가 저작권을 가진 그림 한 점이 어느 목록에도 오르지 못한 채 수장고에 있으니 기묘하다는 말이 정확하다.

 

같은 해에 잡혀간 여덟 명

 

이 사건은 그림 한 점의 이야기가 아니었으며, 1989년 9월 그림마당 민에서 「국가보안법과 미술탄압 — 구속미술인 작품전」이 열렸고, 그 자료집이 그해 구속된 미술인 여덟 명의 이름을 남겼다. 신학철, 홍성담, 정하수, 차일환, 백은일, 이태구, 전승일, 신동옥.

 

홍성담이 주도한 걸개그림 「민족해방운동사」는 가로 77미터, 세로 2.6미터, 열한 폭이었고, 민미연 회원 서른 명가량이 다섯 지역에서 나눠 그렸다. 1989년 6월 29일 한양대 노천극장에 걸렸고, 이튿날 오후 경찰과 전경이 그림을 찢어 불구덩이에 넣었다. 압수가 아니라 소각이었다.

 

홍성담 사건의 대법원 판결도 남아 있으며, 1990년 9월 25일 선고 90도1586은 원심의 유죄 부분을 파기환송했고, 사유는 1989년 8월 12일 변호인 접견신청이 거부된 상태에서 받아낸 자백이었다. "변호인의 접견교통이 위법하게 제한된 상태에서 얻어진 피의자의 자백은 그 증거능력을 부인하여 유죄의 증거에서 배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검사의 상고는 기각되어 간첩죄는 인정되지 않았고, 변호인은 조영래였다.

 

그로부터 35년 뒤, 전승일이 재심을 청구했다. 1989년 전국대학미술운동연합 대표로 「민족해방운동사」 제작에 참여했다가 안기부에 연행돼 남산에서 19일간 취조받은 사람이며, 1991년 4월 징역 1년, 자격정지 1년, 집행유예 2년을 받았다.

 

불법구금이라는 재심사유가 있었기에 그는 재심을 청구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오래 걸렸다. 2024년 6월 10일 청구, 8월 23일 서울중앙지법의 재심 개시 결정, 검찰 항고, 2025년 4월 1일 서울고법 기각, 검찰 재항고, 2025년 5월 28일 대법원 기각으로 개시 확정. 검찰이 재심을 막으려 1년 9개월을 끌었다.

 

2026년 3월 27일 첫 공판에서도 검찰은 무죄를 구형하지 않았고, 불법 구금이 있었더라도 안기부가 수집한 모든 증거가 위법수집증거가 되는 것은 아니라며, 이적표현물 여부를 살펴봐야 한다고 속행을 요청했다. 8월 20일 현재 선고는 나오지 않았다.

 

신학철에게는 그 문조차 없다. 그의 재판에는 고문도 불법구금도 없었고, 법원은 그저 그림을 잘못 읽었을 뿐이다. 잘못 읽은 것은 재심사유가 아니어서 그는 재심을 청구하지 못했고, 검찰은 재심으로 판결이 무효화되지 않는 한 반환할 수 없다고 답했다.

 

"재심 사유가 생겼으면 좋겠는데 당장 할 수 있는 것이 없어서 안타깝다."

 

같은 해 같은 국면에서 함께 구속된 두 사람이 37년 뒤 재심 가능 여부에서 갈렸다. 잘못 판단한 법원을 되돌릴 절차가 없기 때문이다.

 

사람은 복권하고 재산은 돌려주지 않는다

 

신학철은 2000년에 특별사면·복권됐지만, 그림은 국고에 남았다. 사람은 돌아왔고, 재산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것이 한국만의 기형은 아니고, 정치적 몰수를 겪은 나라들의 반환 법제를 훑어보면 같은 설계가 반복된다. 스페인은 1998년 반환법 제1조에서 "동산의 반환은 인정되지 않는다"고 못 박았고, 프랑코 시기 개인 미술품을 원물로 돌려받는 창구는 지금도 없다. 칠레의 1998년 법은 동산을 반환 대상에 넣으면서 보상액을 몰수 당시 가액에 물가지수를 곱한 금액으로 묶었고, 같은 조문에서 부동산은 법 공포일 현재 가액으로 보상하게 했다. 러시아의 1991년 명예회복법에는 반환 조항이 있으며, 파괴된 재산의 배상 상한이 4천 루블이고, 26년째 그대로다. 중국은 1984년 당 문건으로 "원물이 있으면 원주인에게 반환한다"고 정했지만, 실제로는 압수 당시 강요된 자원 기증 서류와 반환 단계의 협의로 흡수됐다.

 

이 설계의 법적 뿌리는 국제법에 있다. 미국 연방대법원이 2021년 2월 전원일치로 재확인한 원칙이다.

 

"국내적 수용은 국가 간의 관계를 침해하지 않았다."

 

국가가 자국민에게서 재산을 빼앗은 것은 국제법 위반이 아니라는 뜻이다. 판결문은 인권법이 발전하는 동안에도 이 원칙이 살아남은 이유를 인권 문서들이 재산권에 대해서는 침묵했기 때문이라고 적는다.

 

문화재 반환에 관한 두 국제협약도 이 사건을 담지 못한다. 1970년 유네스코 협약과 1995년 유니드루아 협약은 모두 국경을 넘은 이동, 절도 또는 불법 반출, 그리고 협약 발효 이후의 사건을 전제로 설계되어 있다. 유네스코 협약 제11조는 강박에 의한 소유권 이전을 불법으로 규정하면서 그 범위를 "외국 세력에 의한 국가 점령"으로 한정했다. 이 한정이 시사적이고, 국가가 자국 영토 안에서 자국민에게 자국 법률에 근거해 한 몰수는 세 요건 중 어느 하나도 채우지 못한다.

 

유럽인권재판소조차 표현의 자유를 근거로 예술작품을 돌려주라고 명한 적이 없고, 1988년 뮐러 사건에서 재판소는 스위스가 회화 세 점을 압수한 것이 협약 제10조 위반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다만 판결문에 이런 문장이 있다.

 

"압수된 물건이 이 사건처럼 원본 회화일 때 특별한 문제가 생긴다. 그 조치로 인해 화가는 자기 작품을 더 이상 원하는 대로 사용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 그림들을 실제로 돌려준 것은 재판소가 아니라 스위스 국내법원이었다. 1999년 카라타슈 사건에서는 위반이 인정됐지만 몰수 취소는 명령되지 않았고, 금전배상만 나왔다. 재판소가 원물 반환을 명한 사례는 있으며, 1995년 그리스 군사정권이 수용한 토지 10만 4천 제곱미터를 6개월 안에 돌려주라고 했고, 다만 그것은 표현의 자유가 아니라 재산권 사건이었다.

 

여기까지 보고 나면 2004년 유엔 결정이 어떤 자리에 서 있는지가 분명해진다. 그것은 재산권이 아니라 표현의 자유를 근거로 그림을 원상 반환하라고 한 결정이었고, 국제 규범이 비워둔 자리에 한 번 발을 디뎠다. 한국 정부는 22년째 그 자리를 비워두고 있다.

 

조항은 그대로 있다

 

「모내기」를 이적표현물로 만든 국가보안법 제7조 제5항은 1991년 5월 31일 개정 이후 35년 3개월 동안 한 글자도 바뀌지 않았다. 그때 바뀐 것도 제2항 삭제에 따른 인용 조항 정리였고, 문서·도화 기타 표현물을 제작·수입·복사·소지·운반·반포·판매 또는 취득하는 행위를 처벌한다는 부분은 1980년 신군부의 전부개정 이래 46년째 그대로다.

 

그 사이 유엔 자유권규약위원회는 1992년, 1999년, 2006년, 2015년, 2023년 다섯 차례에 걸쳐 제7조의 개정 또는 폐지를 권고했다. 1999년 권고는 이렇게 적었다.

 

"제7조에 따라 반국가단체를 고무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는 활동의 범위가 불합리하게 넓다. 규약은 어떤 사상이 적대 세력의 사상과 일치한다는 이유만으로, 또는 그 세력에 대한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 표현을 제한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한국을 방문한 유엔 특별보고관 네 명이 모두 제7조를 지목했고, 그중 셋이 폐지를 권고했다. 국가별 정례인권검토에서는 네 차례 모두 관련 권고를 수용하지 않았다.

 

국회에는 폐지 또는 제7조 삭제 법안이 최소 여덟 건 발의됐고, 2004년에는 여당 의원 151명이 서명한 폐지법률안이 나왔으며, 법제사법위원회 전체회의까지 간 것이 다섯 건이고, 법안심사소위원회에서 표결에 부쳐진 것은 78년 역사상 한 건도 없다.

 

헌법재판소는 열세 차례 이 조항을 심사했고, 모두 합헌 또는 한정합헌으로 결론냈다. 그런데 최근 결정들을 "또 합헌"으로 읽으면 실체를 놓친다. 2023년 9월 26일 결정문의 결론 부분이다.

 

"이적표현물조항 중 '소지·취득한 자'에 관한 부분에 대해서는 재판관 이은애, 이종석, 이영진, 김형두가 합헌의견이고, 재판관 유남석, 김기영, 문형배, 이미선, 정정미가 위헌의견으로, 위헌의견이 다수이기는 하나 헌법 제113조 제1항, 헌법재판소법 제23조 제2항 단서 제1호에서 정한 위헌결정을 위한 심판정족수에는 이르지 못하여 합헌을 선고할 수밖에 없으므로, 주문과 같이 결정한다."

 

재판관 아홉 명 중 다섯 명이 위헌이라고 했지만 여섯 명에 미달해 합헌이 선고됐고, 2018년에도 같은 일이 있었다. 제7조 제5항 소지·취득 부분의 위헌의견은 1990년대 0명에서 2015년 3명, 2018년 5명, 2023년 5명으로 늘어왔다. 「모내기」를 몰수한 바로 그 항이다.

 

그리고 어제, 그러니까 2026년 8월 19일, 새로운 사실이 공개됐다. 제주지방법원 형사합의2부가 8월 3일 국가보안법 제7조 제1항과 제3항에 대해 위헌법률심판을 제청했다는 것이고, 제3항이 정면 심판대상이 되는 것은 2015년 이후 처음이다. 재판부가 든 이유 가운데 하나는 이 조항대로라면 내란을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국가보안법으로 처벌해야 한다는 모순적 결론에 이른다는 것이다.

 

한편 국회에는 2026년 6월 22일 박지원 의원 등 14인이 발의한 국가보안법 개정안이 하나 더 걸려 있다. 제7조를 삭제하자는 것이 아니라 제7조의2를 신설하자는 것인데, 구 제7조 제1항과 제5항으로 유죄가 확정된 사람에게 형사소송법상 재심사유가 없어도 재심을 청구할 수 있게 하는 내용이고, 제안이유에 막걸리 보안법과 1990년 헌재 결정이 인용된다. 신학철이 37년 동안 열지 못한 문이 정확히 이 법안이 메우려는 자리다. 발의된 지 두 달이 지났고, 아직 상정되지 않았다.

 

2023년, 국회가 빈 캔버스를 걸었다

 

2023년 11월 30일, 국회의원회관 전시회 허가 자문위원회가 열렸고, 야당 의원 스무 명이 공동주최하는 '표현의 자유와 국가보안법 전시회'를 심의하는 자리였으며, 문제가 된 작품은 「모내기」를 스물다섯 조각으로 분할해 재해석한 설치작품이었다.

 

자문위원회는 전시가 부적합하다고 결정했고, 사유는 사회윤리 침해 우려였다. 출범한 뒤 처음 나온 부적합 결정이었다.

 

"입법부인 국회에 현행법 위반 소지가 있는 작품을 전시하는 것은 부적절." 국회사무처의 설명이다.

 

주최 측은 12월 7일과 8일 빈 캔버스를 대신 걸었다. 이 사건은 2026년 7월 국회에 등록된 조계원 의원실의 「2025 국정감사 정책보고서」 블랙리스트 연표 21번에 기록되어 있고, 같은 연표 12번은 2023년 4월 국회사무처가 국회의원회관 회의실 및 로비 사용 내규에 전시 허가 조항을 신설해 사전검열을 제도화했다고 적는다. 2004년에 「모내기」를 돌려받자고 시정요구를 냈던 국회가, 19년 뒤에는 그 그림을 재해석한 작품조차 벽에 걸지 못하게 했다.

 

이 상태 그대로가 역사다

 

2024년 12월 17일, 광주시립미술관에서 「신학철 — 시대의 몽타주, 60년 회고전」이 열렸고, 그 전시에 「모내기」가 걸렸다. 다만 1987년에 그린 그 그림이 아니라 1993년에 다시 그린 것이다. 원작은 여전히 국립현대미술관 수장고에 있고, 반출은 물론 전시도 되지 않으며, 회고전조차 원본을 걸지 못했다.

 

두 그림은 치수도 다르며, 원작은 130.3×160.2센티미터, 재제작본은 162.1×112.1센티미터로 기록되어 있고, 똑같이 다시 그렸다는 설명과 어긋나는 부분이다.

 

전시 개막 자리에서 여든한 살의 화가는 새 작업 이야기를 했다. 길이 40미터, 높이 2미터 40센티미터짜리 「갑순이와 갑돌이」 두 번째 연작을 구상 중이라고 했고, 박근혜 탄핵 촛불부터 응원봉을 든 빛의 시위까지 담겠다는 것이다.

 

"아직도 이것밖에 못 내놓았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좀 더 많이 해야 하고 할 일이 많다."

 

그는 자신을 이렇게 규정했다. "저는 운동권은 아니에요. 화가가 이 시대에 무엇을 그려야 할까 생각하다보니 자연스레 민중미술로 나아가게 된 거예요. 어느 시대나 화가라면 현실사회를 생각할 수밖에 없어요."

 

2008년에는 「모내기」에 대해 이런 말도 했다. "내 '모내기' 그림도 이발소 그림을 형상화한 것이었어요. 이발소 그림을 우습게 보지만 그 형식을 빌리고 싶은거죠. 왜 좋으냐고요? 따뜻해요. 유치하지만 꿈과 희망이 있어요." 이발소 그림을 그리려던 화가가 전직 공작원의 감정을 거쳐 반국가단체 동조자가 됐고, 그 판정은 대법원에서 확정됐다.

 

"작품도 자식이라고 이렇게 보니 엄청 반갑다." 30여 년 만에 자기 그림을 다시 본 소감이었다.

 

그리고 원본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했다.

 

"검찰에서 작품을 막 꺾어서 다니고 해서 다 깨진 상태이다. 깨진 작품을 손대지 않겠다 마음 먹었다. 이 상태 그대로가 역사이기 때문이다."

 

접힌 자국을 펴지 않겠다는 말이다. 그림은 지금도 국립현대미술관 수장고에 있으며, 어느 소장품 목록에도 오르지 못했고, 8년 7개월 동안 상태 점검 결과가 공표된 적도 없다.

 

유엔은 22년 전에 원상 그대로 돌려주라고 했다. 원상은 이미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