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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려 있어야 그림인데, 거는 것이 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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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걸개그림은 어디로 갔나 — 대법원 판결문과 미술관 소장품 목록으로 따라간 기록

태워진 칠십칠 미터

 

1989년에 그림 한 점이 불탔다. 길이 77미터, 갑오농민전쟁부터 5·18까지를 담은 걸개그림이었고, 제목은 「민족해방운동사」였다. 전국 다섯 개 예술단체와 서른 개 대학 예술패 회원들이 석 달에 걸쳐 함께 그렸다.

 

이 그림이 어떻게 없어졌는지는 여러 매체가 같은 문장으로 전하는데, 출정식에서 경찰과 백골단에 압수돼 소각됐다는 것이다. 정확히 언제 어디에서 태워졌는지를 적은 1차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남은 것은 슬라이드뿐이었다. 미술사학자 최열이 서울대 아크로폴리스 전시 때 찍어둔 필름이 보존돼 있었고, 서른일곱 해 뒤인 2026년 5월 그 필름을 바탕으로 이 그림이 다시 나타났다. 광주시가 개관한 미디어아트 전시공간에서 디지털과 인공지능 기술로 재창작한 영상 작품으로였다. 복원에는 석 달이 걸렸다.

 

77미터짜리 천 그림이 사라지고, 그것을 찍은 슬라이드가 남고, 그 슬라이드에서 영상이 만들어졌다. 걸개그림이 겪는 일이 대체로 이런 식이다.

 

 

이 그림 때문에 사람이 감옥에 갔고, 그 사건의 대법원 판결이 남아 있다. 1990년 9월 25일 선고된 90도1586 국가보안법위반 사건이다.

 

판결문은 여러 쟁점을 다루는데, 그중 하나가 걸개그림의 존재 방식을 정면으로 건드린다. 이적표현물인 도화를 전시하는 행위가 국가보안법 제7조 제5항이 말하는 '반포'에 해당하느냐는 물음이었고, 대법원은 해당한다고 답했다.

 

"국가보안법 제7조 제5항에 규정된 반포행위는 이적표현물을 불특정 또는 다수인에게 배부하여 지득할 수 있는 상태에 두는 것을 말하므로 이적표현물인 도화를 일반인에게 전시하는 행위도 반포의 범주에 속하는 것"

 

그림을 거는 행위가 곧 배포라는 뜻이다. 걸개그림은 걸리려고 만든 물건인데, 그 거는 일 자체가 구성요건이 된다. 벽에 걸어 여러 사람이 보게 하는 것이 이 미술의 존재 방식이자 동시에 범죄의 실행 행위가 되는 구조다.

 

 

같은 판결은 예술의 자유에 대해서도 판단을 남겼다. 표현의 자유와 예술의 자유가 헌법이 보장하는 기본적 권리이긴 하나 무제한한 것이 아니어서, 헌법 제37조 제2항에 따라 국가안전보장과 질서유지와 공공복리를 위해 필요한 경우 본질적 내용을 침해하지 않는 한도에서 제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간첩 혐의는 무너지고 그림은 남았다

 

이 판결의 구조를 보면 결말이 갈라진다. 대법원은 유죄 부분을 파기환송했다. 회합과 잠입, 통신연락, 간첩에 해당하는 공소사실들에 대해 피고인이 상대방을 북한의 지령을 받은 자로 인식했다고 볼 증거가 부족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판결문의 표현으로는 그 인식이 "단순히 북한에 동조하는 친북한적인 자로 안 정도가 아니라 북한의 지령을 받아 활동하는 자로 안 것"을 의미해야 하는데, 그 정도가 입증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림에 관한 부분은 그대로 유지됐다. 「민족해방운동사」 슬라이드를 북한에 보내 평양축전 미술전람회에 전시하게 한 행위에 국가보안법 제7조 제1항과 제5항을 적용한 원심 판단을 대법원이 수긍했다. 간첩 혐의는 무너졌는데 그림은 남은 것이다.

 

이 판결문에는 피고인의 이름이 나오지 않고 관련자들이 공소외 1 같은 표기로 처리돼 있는데, 그래서 판결문만으로는 누가 재판을 받았는지 알 수 없다. 언론 보도는 이 사건으로 화가 홍성담이 구속돼 세 해를 복역했고 차일환도 함께 구속됐다고 전한다. 그래서 여기서는 사건번호로만 적는다.

 

홍성담은 2019년 경향신문 인터뷰에서 수사 과정에 안기부의 고문이 있었다고 증언했다. 감옥에서 나온 뒤의 상태를 직접 말한 인터뷰도 남아 있다.

 

"옥살이를 하고 나왔는데 몸과 마음이 지치고 힘들었다. 그런데 그때는 어디 가서도 힘들다고 말하기도 어려웠다. 환청도 들리고 환각도 있었는데,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나'를 발견하고 내면에 작동하는 무의식이 무엇인지 밝히기 위해 꿈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한 그의 작품은 여섯 점인데 「민족해방운동사」는 물론 없고, 대신 감옥에 가기 전후로 만든 「오월광주민중항쟁 연작판화 - 새벽」이 들어가 있다.

 

남은 것은 사람과 그가 그린 다른 그림들이고, 정작 문제가 됐던 그 그림만 어디에도 없다.

 

닷새 만에 걸렸다

 

같은 시기 서울에서는 다른 걸개그림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1987년 6월, 연세대생 이한열이 최루탄에 맞아 쓰러진 뒤였다.

 

그림을 그린 최병수는 계기를 사진이라고 했다. 정태원 기자가 찍은 사진을 보고 "한마디로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이었다"고 회고했고, 그 사진이 "단순한 선전과 선동이 아니라 비통함, 분노 등 모든 것이 다 담긴 진짜 사진"이었다고 말했다.

 

 

제작은 빨랐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이한열이 다친 지 닷새인가 엿새 만에 연세대 학생회관에 대형 걸개그림이 걸렸다고 한다.

 

"그 그림은 정말 정신없이 그려졌지… 걸개그림이 건물 위로 높이 올라갈 때, 나는 그걸 바라보면서 엄청난 감동이 밀려왔고 흥분되기도 했지."

 

그림이 건물 벽을 타고 올라가는 것을 보면서 최병수가 느낀 것은 미적 성취가 아니었다.

 

"그때 느낀 게 게릴라였어. 이건 프로파간다의 진수다, 아니 엄청난 무기일 수 있다. 미술이 정말 무기일 수 있다는 게 보인 거지."

 

무기라는 말이 은유로만 쓰인 것은 아니다. 대법원이 도화의 전시를 반포로 판단한 그 논리는 이 그림이 실제로 무엇을 하는 물건인지를 국가 쪽에서 정확히 읽은 결과이기도 하다. 벽에 걸린 그림이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도달하는 힘을, 그린 사람과 잡아들인 쪽이 같은 방식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이 그림은 흔히 최병수 작품으로 소개되지만, 경인일보는 2025년 기사에서 연세대 만화사랑의 김경고·김태경·문영미·이소연 공동제작으로 적었다. 여럿이 함께 그리고 여러 벌로 존재하는 것이 걸개그림의 조건이었고, 작가 표기가 갈리는 일 자체가 이 미술의 성격을 말해준다.

 

최병수가 어떻게 화가가 됐는지에 대한 그의 설명은 기묘하다. 그는 전수학교를 중퇴하고 목수 일을 하던 사람이었다.

 

"조사 과정에서 직업을 묻기에 목수라 했더니 목수는 안 된다 해서 타이핑 치면서 나의 직업을 '화가'라고 쓰더라고. 독재정권 때문에 1호 관제화가 된 거야."

 

경찰이 조서에 적어 넣은 직업이 그의 직업이 됐다는 이야기다. 국가가 예술가를 만드는 방식이 여기서는 발주나 고용이 아니라 조서 작성이었다. 그는 뒷날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에 오른 사실을 뒤늦게 알고 이렇게 말했다. "국민세금으로 사는 사람들이 세금 낸 사람들을 억압한다는 게 독재요, 나치즘하고 똑같다."

 

구백 곱하기 육백오십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 검색에서 「한열이를 살려내라」를 찾으면 같은 제목이 두 건 나온다. 둘 다 1987년 작품이고 작가도 같은데 규격이 다르다. 하나는 관리번호 03492로 규격이 900×650인데, 미술관 해설은 이 작품을 이렇게 적었다.

 

"1987년 민주화 운동 당시 시위의 현장에 직접 쓰였던 것으로 흑백의 대비로 인하여 강렬한 느낌을 준다. 이 작품은 시위 도중 전경에 의해 사망한 이한열을 찍은 사진을 목판화 양식으로 단순화하여 옮긴 것이다."

 

다른 하나는 관리번호 06175로 규격이 46×30이고, 이쪽 해설에는 걸개그림의 성격이 그대로 적혀 있다.

 

"여러 개의 판형으로 제작되었으며, 걸개로 만들어진 작품은 현재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9미터짜리 천 그림과 손에 드는 판화가 같은 이미지다. 한쪽 변의 길이만 스무 배 가까이 차이가 나는 두 물건을 미술관이 각각 등록해 두었고, 판화 쪽 해설이 여러 판형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스스로 적었다.

 

 

여기서 이 미술의 성격이 드러나는데, 걸개그림에는 원본이 하나라는 전제가 처음부터 없었다. 크게 그려 걸고, 작게 찍어 나눠주고, 필요하면 다시 그렸다. 회화가 유일한 물건이라는 관념 쪽에서 보면 이상한 일이지만, 여러 곳에 동시에 걸려야 하는 그림에는 그것이 정상이었다.

 

같은 손에서 나온 이한열 영정은 다른 길을 갔다. 여러 벌 그려진 그림이 아니라 장례식에 바쳐진 한 점이었고, 한 점이 훼손되면 대신 걸 다른 한 점이 없었다.

 

최병수의 설명에 따르면 그 최초의 영정은 이듬해 1주기 추모제에서 반대세력에 의해 칼로 난도됐다. 다시 그린 영정도 이후 추모제에서 누군가 분사 물감을 뿌려 훼손했다. 그는 그 시대를 한 문장으로 요약했다.

 

"경찰의 최루탄으로 희생당한 이에게 또다시 그런 폭력을 저질렀던 시대"

 

그리고 첫 영정이 어떻게 됐는지를 이렇게 적었다. "최초 영정은 결국 분실되었고, 스프레이로 훼손된 뒤 복원한 영정 그림을 이번에 기증하게 되는 것." 국가가 태운 그림이 있고 반대편이 찢은 그림이 있는데, 없어지는 방식만 달랐지 결과는 같았다.

 

 

2012년 최병수는 이한열 대형 영정과 「한열이를 살려내라」 걸개그림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 영구 기증하기로 했다. 사업회가 벌이던 민주화운동 사료 모으기에 동참한 것이었고, 기증 대상은 걸개그림과 영정과 장산곶매를 포함해 일고여덟 점으로 정해졌다. 기증 이유를 그는 짧게 말했다.

 

"시대의 산물이니 개인이 가지고 있을 이유가 없다."

 

이때 기증된 걸개그림은 원본이 아니라 복제본이다. 원본은 국립현대미술관에 있고, 또 다른 복제본은 연세대가 보관하며 전시하고 있다. 한 이미지가 세 기관에 나뉘어 있는 셈인데, 어느 것도 가짜가 아니다.

 

미술관은 무엇을 모았나

 

국립현대미술관이 이 시기 작가들의 작품을 얼마나 갖고 있는지는 소장품 검색으로 확인된다. 신학철이 35점, 황재형이 17점, 오윤이 7점, 홍성담이 6점이고, 최병수는 4점이다.

 

숫자만 보면 캔버스에 그린 사람의 작품이 많고 현장에 걸었던 사람의 작품이 적다. 더 뚜렷한 것은 검색어를 '걸개그림'으로 바꿨을 때다. 제목에 그 말이 들어간 소장품은 이상호의 「화순탄광 노동자 양민학살 천도재 걸개그림」 한 점뿐이고, 그것도 2003년 작품이다. 1980년대 걸개그림은 제목에 걸개그림이라는 말을 달고 있는 채로는 한 점도 없다.

 

미술관이 수집한 것은 옮길 수 있고 보관할 수 있는 물건이었다. 벽 하나를 덮는 천 그림은 그 조건에 잘 맞지 않는다. 말아서 넣어야 하고, 펴려면 그만한 벽이 필요하고, 애초에 여러 벌 존재해서 어느 것을 등록할지부터 정해야 한다.

 

조습의 사진 「습이를 살려내라」도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이다. 2002년 한일월드컵 당시 붉은악마 티셔츠를 입은 모습으로 이 걸개그림 장면을 재현한 작품이다. 원본과 그것을 뒤집은 패러디가 한 수장고에 들어 있다.

 

다시 「민족해방운동사」로 돌아가면, 그 그림이 남긴 것은 최열이 찍은 슬라이드 필름이었다.

 

전시장에서 기록용으로 찍은 사진이 원작이 사라진 뒤 유일한 근거가 됐다. 2026년의 복원은 그 필름을 스캔해 디지털로 옮기고 인공지능 기술로 화면을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광주시가 개관한 미디어아트 전시공간의 1전시실에서 '그날, 그곳을 꺼내다'라는 주제로 공개됐고, 네 개 벽면을 흐르는 영상이 됐다.

 

이 그림은 다섯 개 예술단체와 서른 개 대학 예술패가 함께 그린 것이다. 저작권자가 누구인지, 복원에 누구의 동의를 받았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공동으로 그린 그림의 권리가 누구에게 있는지는 서른일곱 해가 지난 지금 간단히 답할 수 있는 물음이 아니다.

 

무엇이 복원됐는가

 

그림이 사라진 방식은 여러 갈래였는데 되살리는 방식도 그만큼 갈렸다.

 

77미터 걸개그림은 태워진 뒤 슬라이드에서 영상으로 다시 만들어졌다. 이한열 영정은 칼에 찢겨 다시 그려졌고, 다시 그린 것도 물감을 뒤집어쓴 뒤 복원됐다. 「한열이를 살려내라」 걸개는 미술관 수장고로 들어갔고, 복제본 둘 가운데 하나는 연세대가 전시하고 있다.

 

되살린 것이 어디까지 원작인지는 정해진 답이 없다. 다만 걸개그림에서는 그 물음의 무게가 다른 회화와 다르다. 이 그림들은 애초에 원본이 하나여야 할 이유가 없는 물건이었고, 복제되는 것이 훼손이 아니라 목적이었다. 여러 벌 그려 여러 곳에 걸었고, 작게 찍어 나눠 가졌다.

 

그런데 이 그림을 다루는 제도는 전부 원본을 전제로 굴러갔다. 국가는 그림을 내거는 일을 배포로 규정했고, 미술관은 판본마다 관리번호를 붙여 저마다 하나의 물건으로 등록했으며, 복원은 사라진 원본을 대신할 무언가를 만드는 일로 이해된다. 세 제도가 각각 다른 방향에서 같은 것을 요구한 셈이다.

 

최병수가 남긴 문장으로 돌아가면 이 어긋남이 조금 더 분명해진다. 그는 걸개그림이 건물 위로 올라가는 것을 보며 미술이 무기일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했다. 무기는 벽에 걸려 있을 때가 아니라 쓰일 때 무기다. 지금 수장고에 든 900×650센티미터의 천은 그 무기가 쓰이고 남은 자리에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