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석태 미술평론가 | 그림 한가운데에 소가 보인다. 머리와 앞다리만 보아서는 소가 분명한데 나머지는 물고기 꼬리다. 그러니 괴물이고, 이 괴물은 물에서 튀어오르는 듯 그려졌다. 소의 목 위에는 한 팔로는 뿔 한 쪽을 붙들고, 다른 팔로는 자기를 잡으려고 뻗친 손길을 물리치려는 듯한 인물이 타고 있다. 꼬리 부분에 두 다리를 감듯 올라탄 커다란 인물이 앞에 있는 작은 사람을 잡으려는 듯 한 팔을 뻗고 있다. 오른쪽 아래에서 시작된 움직임은 반원을 그리며 왼쪽으로 향한다. 오른쪽 구석에 그려진 연꽃은 꽤 크게 그리고 분홍 빛깔을 칠해, 작은 사람과 마찬가지 빛깔을 띠게 했다. 물감으로 칠한 것은 선으로 그리기를 마무리한 다음이 분명하다. 분홍과 파랑이 전부다. 파랑으로 칠한 곳은 바다로 여겨지는데, 그 사이사이에 그려진 물고기들은 웃는 듯한 표정이다. 괴물에 올라타거나 그 사람을 잡으려는 듯한 분위기를 빼면 따스한 분위기가 화면을 지배한다. 소를 닮은 괴물이 향한 곳은 육지로 설정한 듯 하다. 소의 입과 오리의 목이 서로 닿아있는 것으로 보아, 그 소를 오리는 반기는 듯하다. 그 곁에는 남자인 듯한 인물이 한 다리는 물에 담그고, 한쪽 팔꿈치를 괴고 다른 쪽 팔
미술평론가 최석태 | 18살이 된 1932년, 박수근은 드디어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여 입선한다. 당시 공모전은 이 조선미술전람회와 서화협회가 개최하는 것, 단 두 개뿐이었다. 서화협회가 여는 전시는 총독부가 개최하는 조선미술전람회보다 한 해 앞서 시작한 것으로, 줄여서 ‘협전’이라고 불렀다. ‘협전’은 민족계가 운영하는 전람회로 1921년 4월에 처음 열렸다. 1919년 3월 혁명(3.1만세운동)으로 허용된 몇 개의 일간지와 월간지가 민족 성원들의 목소리를 조금은 낼 수 있게 되면서 총독부가 허용한 것이 서화협회 전시였다. 그러나 협전의 역량은 문화통치를 표방한 총독부에서 이듬해인 1922년 시작한 조선미술전람회에 훨씬 미치지 못했다. 친일인사도 다수 참여했지만, 총독부가 주관하는 전람회에 비해 그 위세가 비할 바 없이 초라했다. 1931년 11회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처음 공모를 실시했고, 그나마도 박수근이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한 해인 1932년에는 열지도 못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것이 최종학력으로 전문미술교육을 받지 못한 박수근이 공모전에 처음으로 출품하려고 했는데 하필 ‘협전’이 개최되지 않아서 그랬는지 몰라도, 아무튼 박수근은 총독부의 조선미술전람
최석태 미술평론가 | 복숭아가 열린 나무 한 그루가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사람은 넷. 나무에 기어오르거나 매달리고, 나무 뒤에 숨은 듯 보이며 나머지 한 사람은 그런 광경을 보는 듯하다. 그림에 나오는 사람들은 모두 어린이일까? 필자도 처음에는 이 그림의 등장인물을 모두 어린이로 파악했지만, 그림 아랫부분의 두 인물 크기로 보아서는 잘못 파악한 것이라고 본다. 아래 두 어른은 어머니와 아버지이고, 복숭아나무에 오르거나 매달린 두 아이는 그 자식들이다. 아이들은 아이답게 나무에 기어오르거나 매달린 것이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또렷이 알 수 있는 표현은 일부러 하지 않은 듯하다. 복숭아는 신선 세계의 과일로 알려져, 장수, 젊음, 불로장생을 의미하였다. 복사꽃 마을 이야기와 시는 도연명 이래 중국은 물론 우리 옛시인들도 즐겨 노래하는 이야기다. 서왕모 이야기에 등장하는 천도복숭아는 그림으로도, 도자 연적으로 만들어지기도 하여 사랑받아왔다. 조선 시대 초기 화가인 안견은 안평대군의 청으로 꿈속에 본 복숭아밭 그림(몽유도원도)을 그리기도 했다. 이중섭도 대구에 있던 시절 아파 누운 친구 구상 시인에게 큰 복숭아 속에 청개구리와 노는 아이 모습을 그린 그림을 주었
미술평론가 최석태 | ‘박생광’이라고 하면, 그 이름이라도 아는 사람은 탱화 같은 그림을 그린 분이라고 한다. 탱화라면 절에 걸려 있는 그림을 가리킨다. 절의 이런저런 건물 안에 걸린 채색이 짙은 그림들과 분위기가 비슷하다고 여겨서 나오는 반응이라고 여겨진다. 흔히 접하는 한국화, 이른바 전통 회화가 아직 대부분 선이나 농담이 먹으로 그려진 위에 옅게 채색이 곁들여지는 것이 대부분인 상태다. 그에 비하여 박생광의 그림은 짙은 채색이 넘쳐흘러 너무나 다른 느낌을 준다. 채색이 넘쳐흐르는 것에 더하여, 넘쳐흐르는 채색을 붉은 선들로 둘러쳐서 색채감을 더욱 높여준다. 돌이켜보면 일본 강점기에 강요되다시피한 분위기 속에서 그려지던 일본식 채색화에 광복 시기에 반작용이 강하게 작용하여, 한국화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먹 위주의 그림이 대세를 차지했다. 좀 과장하자면, 여성인 천경자에게만 채색화가 허용되는 분위기였다. 박생광도 예외는 아니라서, 어정쩡한 자세를 보였다. 박생광의 진한 채색화는 이런 분위기에서 놀라운 제안이었다. 그러면 박생광의 특징이 된 진한 색채의 그림은 언제 처음으로 선보인 것일까? 1979년 6월에 서울에서 열린 제2회 중앙미술대상전의 초대에 응해 출
최석태 미술평론가 | 봉황은 세상에 없는 상상의 동물이지만, 이들이 한 자리에 모이면 태평성대가 온다고 한다. 그래서 조선 왕조 궁궐의 주요 건물 천정에도 봉황을 그리고, 들머리 계단 옆 공간에도 돋을 새김으로 장식하였다. 지금도 대통령 자리 뒷 벽에 이런 문화는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이중섭은 봉과 황을 그리면서, 태평성대는 커녕 봉과 황이 서로 만나려고 해도 그럴 수 없는 상태를 그렸다. 작가는 이 그림으로 사람들이 안타까운 현실을 느끼도록 하고자 했으나 우리 후손들은 이를 잘 모르고 있는, 그런 그림이다. 단지 그린 이의 부부가 서로 못 만나서 안타까와 하는 것으로 여길 뿐이다. 지하의 이중섭이 가슴을 치며 안타까와 할 일이다. 이중섭이 그린 그러한 봉황 그림은 두 개이다. 하나는 진위 여부를 놓고 논쟁이 있는 그림이고, 하나는 제목이 문제이다. 먼저, 진위여부가 문제인 그림을 보자. 이 그림은 다음에 소개할 완성작에 비해 봉과 황의 형상이 간략하다. 이로 인해 이 그림을 가짜라고 하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이 그림은 그리는 도중에 도둑맞은 그림이다. 당시 이중섭의 집에는 늘 도둑이 들끓었다. 그의 그림이 돈이 되었기 때문이다. 가로로 줄이 쳐진 그림
최석태 미술평론가 | 박수근은 겨울 느낌의 화가인가? 적어도 가을 느낌을 포함한 겨울 느낌의 화가인 것은 분명하지 않은가? 스무살에 그려 <봄이 오다>라는 이름을 붙여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 입선에 든 박수근에게 겨울 느낌의 화가라니? 그로부터 5년 뒤에 봄 나물을 캐는 소녀들을 그린 그림 <봄>을 그린 박수근이 아니던가! 이 소재는 1950년대 초에도 되풀이 그려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수근은 나목의 화가다. 추워지면서 잎을 떨군 나무를 우리는 보통 나목이라고 한다. 불에 타거나 포탄을 맞아 죽은 나무를 고사목이라고 하지만, 이런 나무도 나목이라 한다. 그런 상태의 나무를 많이, 자주 그렸던 화가이고 등장하는 인물들도 침묵하는 분위기이니 그의 그림에 대하여 겨울 느낌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벛꽃>이라는 그림은 그 소재부터 봄에 피는 꽃을 그린 것이니 앞에서 한겨울 느낌의 화가라는 말은 분명 거짓이거나 과장일 수 있다. 그러나 봄이 왔다고 봄인가? 봄 다워야 봄이지! 이 그림은 봄꽃을 그렸을 뿐 아니라, 그려진 상태까지도 보통의 박수근 그림과는 달리 봄다운 싱그러움이 확연하다. 그림 전체에서 느껴지는 밝은 분위
최석태 미술평론가 | 이중섭이 그린 그림 가운데 흔히 은박지라고 하는 바탕에 그린 그림들이 있다. 은박지는 그 이름으로 보아 은을 엷게 펴서 종이에 붙인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그 '은'은 사실 알루미늄을 가리킨다. 알루미늄을 흔히 양은이라고 하고, 그냥 은이라고도 부른다. 지금은 양은이 식기나 일상용품으로 흔히 쓰이지만, 자연 상태에서는 귀한 것이라서 전기분해로 대량 생산되어 싸지기 전에는 금과 은 다음으로 귀한 대접을 받았던 귀금속이다. 은박 기술이 발달한 지금은 은박지가 아주 얇아서 이를 긁어내 그림을 그리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지만, 옛날에는 꽤 두툼하고 튼튼했다. 알루미늄 박지를 긁어서 밑그림을 그린 다음 담뱃진이나 물감을 칠하고 닦아내는 과정을 거친 이 그림들은 재료가 특별한 점 말고도, 접힌 자국이나 모서리 등 한정된 공간을 이용하면서도 섬세하게 표현해내는 이중섭의 뛰어난 그림 솜씨를 볼 수 있다. 이런 종류의 그림은 그 자체가 지닌 맛에 더하여 중섭이 스스로 아내에게 밝힌 바에 의하면 ‘대작의 준비 작업’이기도 했다. 또한, 언제 어디서나 작업이 가능했기 때문에 그때그때의 느낌을 기록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중섭은 은박지 그림을 언제부터 그렸을까?
최석태 미술평론가 | 눈이 내리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화면 중간을 차지하고 있는 헐벗은 나무 뒤로 길을 걷는 사람들을 제외하면, 땅도 하늘도 구분이 되지 않을뿐더러 온통 뿌옇다. 보통의 박수근 그림과 달리 이 나무는 그림의 아랫변을 땅으로 삼아 서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나무 아랫부분 밑둥과 가지의 윗부분은 박수근이 잡아낸 장면의 바깥으로 뻗어 있다. 나무 뒤로는 머리 위에 무언가를 이고 있는 세 여인이 걷고 있다. 그림의 전체적인 분위기 때문인지, 약간은 지쳐 보인다. 여인네들은 하루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일까? 함지 같은 것을 머리에 얹었으나 위가 볼록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팔 것을 다 팔아 거의 비어버린 함지를 이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러고 보니 하루가 저물 무렵, 눈이 약간 오는 때에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 같다. 나무줄기 한가운데에 크고 작은 가지들이 나뉘어 뻗어간다. 그런데 앞부분에 가지들이 조금만 남은 상태로 잘려져 있다. 굵기로 보아 어느 정도 자란 뒤에 잘려진 것같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더니, 바람 잦아지라고 위로 뻗는 가지 세 개만 남겼을까? 나무의 전체 모습이 옆으로 누워 있는 것으로 보아,
미술평론가 최석태 | 지인들에게 이 그림을 본 인상을 물었다. 다들 산만하다고 한다. 맞다. 처음 이 그림을 슬쩍 봐서는 눈에 확 들어오는 것이 없다. 하지만 가만히 보면, 분주히 무언가를 하고 있는 네 사람이 눈에 들어온다. 그림의 위쪽에 있는 두 사람은 광주리인 듯 보이는 것을 중심으로, 한 사람은 그것을 받쳐 들었고 또 한 사람은 끌고 있는듯하다. 둘은 분명 아이, 그것도 남자아이다. 그림 아래의 둘은 모두 무언가를 붙들고 있다. 오른쪽 사람은 비교적 선명한 몸통의 모양과 붉은 벼슬로 보아 닭인 듯 싶은데, 자세를 보아하니 닭의 발을 잡고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있는듯하다. 다른 한 사람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들고 있는 흰 물체를 따라가 보면 바닥으로 쭉 뻗은 머리 부분에 붉은 벼슬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또한 닭인듯하다. 이들이 닭을 붙잡고 있는 걸로 보아 위에 있는 광주리 속에는 노란 새끼 닭, 즉 병아리다. 화가는 어린이임에 분명한 위의 두 사람에게 윗도리를 입혔다. 아래의 둘은 옷을 입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이 정황이 보는 이를 더욱 헷갈리게 한다. 아래 사람도 어린이라면 그들에게는 왜 옷을 입히지 않았을까? 그저 닭의 색과 옷 색이
최석태 작가 | 이 그림에 대하여 오랜 시간에 걸쳐 여러 번 언급한 고 이구열 선생님은 이중섭이 연필을 남다르게 구사한 점에 주목했다. 표현이 육중하고 사색적이라고 높이 평가하고, 기법이 놀랍고 예술적 깊이가 완벽하여 감탄을 자아낸다고 하였다. 세 사람이 그림을 꽉 채우고 있다. 그다지 크지 않은 화면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맨 앞 사람이다. 그 뒤에 세운 무릎에 두 팔을 얹고 머리를 웅크리고 앉은 인물을 배치했다. 그 뒤로는 두 팔을 깔고 엎어져 누운 인물이 보인다. 배경은 땅바닥인 듯 가로줄이 그어졌다. 뒤에 있는 두 사람이 다소 무기력해 보이는 것과 달리, 앞의 사람은 보는 사람에게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자세를 하고 있다. 무언가를 모르는 척하는 것 같다. 왼팔을 얼굴 위에 놓고, 잔뜩 긴장한 상태이다. 누군가가 자신을 건드리기만 해도 바로 반격할 태세다. 무릎을 세워 접은 왼쪽 다리와 바닥에 기대어 접은 오른발은, 왼손과 마찬가지로 잔뜩 긴장한 상태다. 앞 사람의 왼쪽 팔과 오른쪽 발은 연필을 거듭 그어대서 매우 진한 상태다. 나는 맨 앞에 있는 사람을 이중섭이 얼마나 정성 들여 고쳐 그렸는가 하는 점에 주목한다. 반바지 아래로 드러난 오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