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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속 뜻, 박수근 <벚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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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석태 미술평론가 |

 

박수근은 겨울 느낌의 화가인가? 적어도 가을 느낌을 포함한 겨울 느낌의 화가인 것은 분명하지 않은가? 스무살에 그려 <봄이 오다>라는 이름을 붙여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 입선에 든 박수근에게 겨울 느낌의 화가라니? 그로부터 5년 뒤에 봄 나물을 캐는 소녀들을 그린 그림 <봄>을 그린 박수근이 아니던가! 이 소재는 1950년대 초에도 되풀이 그려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수근은 나목의 화가다. 추워지면서 잎을 떨군 나무를 우리는 보통 나목이라고 한다. 불에 타거나 포탄을 맞아 죽은 나무를 고사목이라고 하지만, 이런 나무도 나목이라 한다. 그런 상태의 나무를 많이, 자주 그렸던 화가이고 등장하는 인물들도 침묵하는 분위기이니 그의 그림에 대하여 겨울 느낌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벛꽃>이라는 그림은 그 소재부터 봄에 피는 꽃을 그린 것이니 앞에서 한겨울 느낌의 화가라는 말은 분명 거짓이거나 과장일 수 있다. 그러나 봄이 왔다고 봄인가? 봄 다워야 봄이지! 이 그림은 봄꽃을 그렸을 뿐 아니라, 그려진 상태까지도 보통의 박수근 그림과는 달리 봄다운 싱그러움이 확연하다.

 

그림 전체에서 느껴지는 밝은 분위기는 물론 물감이 칠해진 느낌도 박수근의 여늬 그림과는 다르다. 방금 흰색의 회를 바른 것 같은 화면이다. 화강암 같은 재질감과 색감이 아니라, 밝은 바탕 위에 이 바탕칠이 마르기도 전에 붓이 아니라, 분명 연필로 윤곽선 긋기를 감행했다.

 

그런 뒤 충분히 마르기를 기다려 꽃과 잎에 해당하는 부분에 각기 어울리는 색깔을 발랐다. 그랬기에 색깔들은 반들반들한 바탕 위에 미끄러지는듯 발라졌다. 이 색깔들은 상당히 묽다.

 

이 그림은 1961년에 그려졌다. 그림의 윗부분에는 흰 꽃이, 그 아래 대부분은 분홍 꽃인데 모양은 다르다. 서로 종류가 다른 벚꽃으로 보이는 것으로 보아, 봄에 그려진 것이리라. 분홍 벚꽃을 그린 방식은 당시 유행하던 놀이였던 화투패에 그려진 벚꽃 그림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같기도 하다.

 

 

박수근은 곧 있을 쿠데타를 모른 채, 지난 해 봄부터 펼쳐진 새로운 분위기 속에서 이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이것을 이름하여 4.19 공간이라고 하자. 1960년 봄, 이 벅찬 국면을 맞은 시인 김수영은 당시 대통령이던 이승만의 사진을 벽에서 떼어내 밑씻개로 쓰자고 소리 높여 노래했다.

 

이때로부터 10년 뒤인 1970년에 박수근이라는 화가를 잊기 힘들 정도로 좋은 인물로 그려낸 소설 <나목>을 써낸 박완서는 지난날을 돌아보는 글에서, 1960년 4월 이래 기쁨에 차 날마다 거리를 거닐며 쏘다녔다고 했다.

 

바로 그 한 해 전에 태어난 나에게는 박정희가 죽은 뒤, 그리고 1987년 6월항쟁의 시기가 이런 비슷한 느낌이었다. 실패하였기는 해도, 1919년 3월 만세 혁명의 다음에도 이 비슷한 분위기였을 것이다. 동학혁명의 한 시기, 전주성을 접수하여 해방했을 때도 그랬으리라.

 

일본의 강제 점령하에서 태어나 살았던 박수근의 삶에서는 광복의 시기에 잠시 그랬을 것이다. 10년도 더 지나 지긋지긋했던 이승만 독재의 그늘에서 살았던 박수근이기에 더 그랬을 것 같다. 그는 북한 치하에서 중학교 교사이면서 기초 단위 대의원이기도 했으므로, 초등학교만 나온 것으로 알려진 자신의 신상을 내세워 침묵하고 지내왔다.

 

 

이런 기법으로 그려진 그림은 1960년 봄의 민주화 분위기 속에서 시작되었는데, 박정희의 쿠데타로 그 봄의 분위기가 사라진 뒤에도 계속 그려졌다. 물론 그 이전부터 시작되어 날이 갈수록 정갈해져 가는 화강암 같은 재질감의 그림을 완성하려는 노력과 병행하였다. 이전의 그림에 비해 좀 더 밝고,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완성이 빠른 이 기법은 아직은 잘 알려지지 않은 박수근의 다른 면모다.

 

이런 기법으로 그려진 그림은 그가 사망하는 1965년까지 5년 남짓 동안 대략 20점 정도이다. 그런데 그 20점은 박수근의 그림들 가운데 꽤 소외되어 있다. 이전과는 너무 다른 화풍으로 인해 박수근의 그림이 아니라는 사람도 있었고, 마지못해 박수근의 작품임을 인정하더라도 도록에 제대로 싣지 않기도 했다.

 

이런 이유로 이 아름다운 그림들은 판로를 찾기 어려워 잘 유통되지 않았다. 그러나 박수근의 작품에는 태작이 없다. 새로운 화풍의 20점도 마찬가지이다. 고유한 화법에 회화적 요소를 좀 더 많이 가미해 조화롭게 적용한 수작이다. 희망과 즐거움이 넘실거리는 새로운 화풍의 박수근 그림을, 한 자리에 모아놓고 감상할 수 있는 날이 오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