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우리 모두 낙원의 가족이 되기를, <도원> 이중섭

URL복사

최석태 미술평론가  |

 

복숭아가 열린 나무 한 그루가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사람은 넷. 나무에 기어오르거나 매달리고, 나무 뒤에 숨은 듯 보이며 나머지 한 사람은 그런 광경을 보는 듯하다.

 

 

그림에 나오는 사람들은 모두 어린이일까? 필자도 처음에는 이 그림의 등장인물을 모두 어린이로 파악했지만, 그림 아랫부분의 두 인물 크기로 보아서는 잘못 파악한 것이라고 본다. 아래 두 어른은 어머니와 아버지이고, 복숭아나무에 오르거나 매달린 두 아이는 그 자식들이다. 아이들은 아이답게 나무에 기어오르거나 매달린 것이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또렷이 알 수 있는 표현은 일부러 하지 않은 듯하다.

 

복숭아는 신선 세계의 과일로 알려져, 장수, 젊음, 불로장생을 의미하였다. 복사꽃 마을 이야기와 시는 도연명 이래 중국은 물론 우리 옛시인들도 즐겨 노래하는 이야기다. 서왕모 이야기에 등장하는 천도복숭아는 그림으로도, 도자 연적으로 만들어지기도 하여 사랑받아왔다. 조선 시대 초기 화가인 안견은 안평대군의 청으로 꿈속에 본 복숭아밭 그림(몽유도원도)을 그리기도 했다. 이중섭도 대구에 있던 시절 아파 누운 친구 구상 시인에게 큰 복숭아 속에 청개구리와 노는 아이 모습을 그린 그림을 주었다. 먹으면 무슨 병이든 낫는다는 천도복숭아를 떠올리며 병이 빨리 나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이중섭에게 복숭아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었던 것 같다. 결혼 직후 낳은 첫 아이가 죽자, 복숭아와 아이를 어울리게 그려 넣은 그림을 관에 넣어주었다고 한다. 이후 헤어져 있게 된 아이들에게는 아이와 복숭아가 어우러지게 그린 그림을 그려 보냈다.

 

이중섭은 장수나 젊음 등 개인의 기원을 넘어서 공동체의 간절한 바람이나 이상향을 상징하는 이미지로 복숭아를 그린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는 이 그림에서 복숭아밭에 가족의 이미지를 덧붙여 온 가족이 낙원에 있는 이미지를 완성한 것이다. 이 그림에서 산인지 돌인지 모르겠지만 세 부분으로 나뉘어진 언덕을 그리면서도 이중섭은 고구려 춤그림 무덤 속 사냥 그림에 표현된 산 모습과 비슷한 표현 방식을 썼다.  우리 조상들이 즐긴 이야기를 그리면서, 우리 조상들의 미술문화 유산을 끌어들인 점에 이중섭의 남다름이 있다. 

 

또한 이 그림에서 하늘은 노란색으로 칠한 점이 특히하다. 강인지 바다인지 모르겠으나 물 너머 산의 주름 사이는 하늘빛으로 칠해졌음에도, 정작 하늘은 노랗게 칠해졌다. 그림 전체를 감싸고 도는 누런 색감 때문에, 하늘이 노랗게 칠해진 것을 우리 관객은 별로 의식하지 못한다.

 

노랑은 금색이며 금빛 하늘은 그리스로마신화에서 낙원 이타카의 금비가 내리는 하늘이다. 이중섭은 낙원을 강조하기 위해 자신만의 표현법을 동원한 듯하다.  연애 시절 그린 엽서 그림에서 산에 칠해야 할듯한 짙은 풀빛색을 하늘에 칠해 특별한 분위기를 연출한 것처럼, 여기서 하늘빛을 노랑으로 바꾸어 그림 의 분위기를 돋구고 있다. 

 

 

이 그림은 언제, 어디서 그려졌을까? 이구열 선생은 1953년 내지 1954년으로 파악하고 있다. 필자도 막연하게 1953년으로 파악했다. 임영방 선생도 이중섭이 헤어졌던 가족을 만나기 전, 초조와 불안을 안고 나날을 보내기 이전이라고 했으니 1952년으로 보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1999년의 갤러리현대에서의 이중섭 전시회에 방문한 이성운 선생은, 1954년 가을 서울 종로구 누상동에서 이 그림을 보았다고 증언하였다. 자신이 얼마 전 머물렀던 통영에서 함께 만났던 동료들과 이중섭이 살던 종로의 집을 방문했을 때 마루에서 제작 중이던 그림을 보았다는 것이다.

 

이중섭의 호인 ‘대향’으로 이름 쓴 작품은 많지 않은데, 이 작품이 그 중 하나다. 아울러 이 그림은 이중섭의 남은 작품 중 가장 큰 크기다. 당시 중섭은 여러가지 이유로 소장하기 좋은 크기의 그림을 선호했지만, 통영에서 서울로 옮겨 정착하여 새로이 품게 된 희망을 담아 크게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친구의 소유였던 이 집은 그러나 곧 팔려서 옮기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런데 이 그림과 거의 같은 도상이라고 할 그림이 알미늄박지로 그린 것이 있다. 이중섭은 외가인 평양에서 초등과정을 보냈는데, 동네 선배이자 뒷날 극작가로 유명했던 오영진이 주재하던 문예지에 여러 번 삽화를 부탁받아 그렸다. 이 때 이 잡지의 편집 책임자인 시인 박남수가 이중섭의 이 알미늄 박지 그림을 비롯, 여러 장을 소장하게 되었다. 그 그림이 유화 <도원>과 비슷하다.
 

 

알미늄 박지에 가로선이 그려진 것은 물을 표현한 것인지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이 그림을 유화로 그리면서, 화면 중앙에 바다인지 강인지는 몰라도 물을 선명하게 표현하였다. 알마늄 박지에 그린 영지는 빼버렸다. 이중섭이 알미늄박지에 그린 그림들을 통해 이후에 그릴 본격 그림을 구상하고 연구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