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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근의 희귀 정물화, <철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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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볼 수 있는 박수근의 그림 중에는 가장 첫 작품
어머니를 대신해 밥하고 빨래하며 가족을 돌보던 시기의 그림

미술평론가 최석태 |

 

18살이 된 1932년, 박수근은 드디어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여 입선한다. 당시 공모전은 이 조선미술전람회와 서화협회가 개최하는 것, 단 두 개뿐이었다.

 

 

서화협회가 여는 전시는 총독부가 개최하는 조선미술전람회보다 한 해 앞서 시작한 것으로, 줄여서 ‘협전’이라고 불렀다. ‘협전’은 민족계가 운영하는 전람회로 1921년 4월에 처음 열렸다. 1919년 3월 혁명(3.1만세운동)으로 허용된 몇 개의 일간지와 월간지가 민족 성원들의 목소리를 조금은 낼 수 있게 되면서 총독부가 허용한 것이 서화협회 전시였다.

 

그러나 협전의 역량은 문화통치를 표방한 총독부에서 이듬해인 1922년 시작한 조선미술전람회에 훨씬 미치지 못했다. 친일인사도 다수 참여했지만, 총독부가 주관하는 전람회에 비해 그 위세가 비할 바 없이 초라했다. 1931년 11회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처음 공모를 실시했고, 그나마도 박수근이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한 해인 1932년에는 열지도 못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것이 최종학력으로 전문미술교육을 받지 못한 박수근이 공모전에 처음으로 출품하려고 했는데 하필 ‘협전’이 개최되지 않아서 그랬는지 몰라도, 아무튼 박수근은 총독부의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여 처음 입선했다.

 

강원도 춘천에서 통신강의록으로 고학하며 독학으로 그림 공부를 하던 박수근은, 일간지를 통해 공모 사실을 알고 작품을 준비하여, 춘천의 미술재료가게에 가서 다 된 작품의 액자를 맡겼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찾아 서울로 들고 가서 직접 접수했을 것이다.

 

 

심사 결과는 여러 일간지에 명단으로 발표되었고 곧이어 그림이 전시되었다. 그의 첫 입선 소식을 접하고 본인은 물론 초등학교 졸업한 뒤에도 도움을 주었던 일본인 교장 선생님, 담임이었던 오득영 선생님 등이 기뻐했다고 부인은 회고했다. 박수근은 용기를 얻어 열심히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어머니와 달리 아버지는 그림 그리는 일로 아들의 장래가 얼마나 밝을까 싶어 꾸짖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즈음 어머니가 암에 걸려 춘천의 도립병원에 입원해야 했다. 병 걸린 어머니의 먹고 입을 것이야 병원에서 한다고 하더라도 아버지와 동생들을 돌보는 일은 미혼의 박수근의 차지가 되었다. 누나는 어머니가 아프기 전에 이미 따로 살고있었다고 한다.

 

아버지와 동생들 그리고 본인까지 너댓명이 먹고 입을 것을 책임진다는 말은 무엇을 뜻할까? 어머니 대신 우물로 가서 물동이로 물을 길어와야 했고, 형편에 맞춰 직접 밀을 사다가 맷돌에 갈아서 가루로 만든 다음 수제비를 끓여 나누어 먹었다. 빨래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결혼후 박수근은 아내에게, 어머니 병이 유방암으로 판명되었을 때 부엌에 나가 일하며 어머니 손때 묻은 그릇을 만지며 눈물을 한없이 쏟았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박수근은 어머니 돌아가시면 이 그릇들은 어쩌나 생각하니 가슴이 아파 남몰래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는 말을 하면서 또 울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결국 3년을 못 넘기고 돌아가신다.

 

그 와중에 부지런히 그림을 그렸다고 하지만, 얼마나 그럴 수 있었을까? 박수근이 조선미술전람회에 다시 입선하면서 얼굴을 내보인 것은 4년 뒤인 1936년이 되어서다. 아래 <철쭉>은 그 4년 사이에 그려진 2점의 수채화 가운데 하나이다. 초등 과정 스승인 오득영 선생님에게 아마도 감사의 뜻으로 드린 그림이지 아닐까 한다.

 

이 그림은 박수근의 남아 있는 그림 가운데 가장 첫 작품이다. 착실한 학생의 그림 이상은 아니라고 하겠지만, 어머니를 대신하여 가족을 먹이고 입히는 고생을 겪는 가운데에도 붓을 놓지 않으면서 박수근의 내면이 얼마나 튼튼해졌을까를 상상하게 만든다.

 

 

첫 입선부터 두 번째 입선 사이에 이런 일이 있었음에도 박수근을 다룬 대부분 논자들은 그사이 박수근이 그림을 출품했지만 낙선했다고 단언한다. 그랬을 수도 있었겠지만, 과연 그가 그림을 출품할 겨를이 있었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니 확언하면 곤란하다.

 

이 그림은 박수근 10주기 기념 전람회의 도록에 참고자료로 단색도판으로 실린 이래 공개되지 않고 있다가 2015년 서울 동대문 DDP 오간수문 전시장에서 열린 국민화가 박수근 전시에 필자의 주선으로 처음 전시에 선보인 이래 주요한 박수근 전시마다 선보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