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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이 광복 전에 <달맞이>를 그린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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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와 '가족' 만큼이나 '달'을 주제로 그린 이중섭
서양식 그림을 벗어나 우리 정신을 담다

최석태 작가 |

 

 

그림 아래쪽에 알몸을 드러내고 누운 여자를 그렸다. 다리를 얌전하게 구부리고 앉은 동물에게 몸을 기대고 누운 상태다. 여자는 얼굴을 돌린 채 눈을 감고 있다. 잠에 빠져든 듯하나 무릎은 올리고 있는 상태이다.

 

여자와 한 덩어리를 이룬 동물 뒤에는 두 마리의 커다란 새를 배치했다. 둘 다 날개를 편 상태로 그 중 한 마리는 부리가 한껏 벌려져 마치 무슨 소리를 내지르는 것 같다.  여자와 동물들이 이룬 무리 뒤로 길이 이어져 있으나 이내 끊어져 있으며 그 너머는 절벽으로 설정했다.

 

다소 멀리 있는 듯한 물을 넘어 보이는 산등성이 옆으로 달이 조금 보인다. 입을 벌려 외치는 듯한 새는 바로 그 달을 보면서 여자더러 잠을 깨 일어나 달을 맞으러 가라고 외치는 것 아닐까?

 

1940년, 25살을 맞은 이중섭이 그 해 전반기에 일본에서 그린 그림이 바로 이 그림이다. 이 그림은 당시 일본의 신예 미술가단체 자유미술가협회(지유미즈츠카교카이)가 영향력을 넓히기 위해 만든 공모전에 출품한 것이다. 이 그림 이름 <망월>은 한자어로, 이중섭이 활동하던 당시 일본에서는 많은 그림 이름을 한자로 적었었다. 우리말로 하면 달맞이, 달보기이다. 앞으로는 이 그림의 이름을 <달맞이>라고 할 것을 제안한다.

 

그런테 달맞이는 왜 하자는 것일까? 달, 특히 보름달은 풍요와 다산의 상징이다. 달은 지구에 가장 가까이 딸린 별로 우주적 생명력의 전형이다. 달은 바닷물을 움직여서 해면의 높이를 변하게 만든다. 달은 우리 민족이 아주 사랑하는 존재다. 우리의 우주관, 세계관과 인생관 그리고 생활습속 등에 걸쳐 매우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태양과 비교가 안될 정도다. 전통 한국사회는 ‘달 중심’이라 할 정도로 달을 존중하는 문화풍토다. 달을 읊은 노래나 정월 대보름을 맞이하여 벌이는 소원빌기, 달집태우기, 쥐불놀이, 횃불싸움 등 달을 중심으로 많은 생활 문화가 번성했다.

 

이중섭은 우리의 달에 대한 태도를 깊이 알았던 듯 하다. 달을 그린 그림은 꽤 많다. 그러나 달을 둘러싼 어떤 설정을 주제로 하여 그림 그린 화가는 누가 있는지 싶다. 이중섭은 이 그림에 이어 같은 이름의 그림을 두 점  더 연이어서 그리는 한편, 평생 달을 다룬 그림들을 적지 않게 그렸다. '소'나 '가족' 같은 주요 주제에 못지 않은 것이 달이다. 

 

이중섭이 이 그림에서 달을 둘러싸고 무슨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듯한 설정은 아무래도 민족 의식이나 생활을 암시하는 것 같다. 유화로 그렸지만, 그림의 알맹이는 철저히 우리의 의식이나 생활을 다룬 것이다. 이런 점이 당시 식민지 조선은 물론이고 일본에서도 그를 혜성과 같이 나타난 놀라운 화가라고 평한 까닭이 아닐까? 이중섭의 그림이 초기부터 단순한 서양식 그림을 훌쩍 벗어난 상태임을 우리는 이 그림들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중섭의 초기 그림은 아쉽게도 남아있는 것이 매우 적다. 이중섭만 그런 것이 아니다. 식민지지배와 분단 그리고 전쟁으로 얼룩졌던 시기를 살다간 거의 모든 이들이 거의 다 그렇다. 이중섭은 우리 국토 북서부인 평안도 평원에서 나고 평양에서 자라다가 북동부인 함경도 원산에서 신혼 살림을 꾸리던 중에 전쟁으로 이주한 전쟁난민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이전 작품이 남아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는 것이다.

 

특히 원산은 전쟁이 시작된 날부터 휴전하는 3년 내내 미국군의 항공폭격이 끊임없을 정도라 ‘원산폭격’이라는 말이 전후 세대도 익숙할 정도였다. 이런 사정은 화가 박생광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박생광이 우리 국토 남부인 남원에서 태어나서 진주에서 살았으므로 많이 남아있으리라 여기겠지만 아쉽게도 진주는 한국전쟁 때 점령지였던 곳이라 이른바 탈환하면서 전시가지가 잿더미 상태로 되었는데, 그의 집에 두었던 어린 시절의 흔적은 물론 일본에서 공부하고 화가로 활동하면서 그려 남긴 모든 작품도 아울러 잿더미가 되어버렸다.

 

적게나마 남아 있는 흔적은 아주 가치 있는 것이다. 흑백사진으로나마 남아 있는 자그마한 흔적들도 아주 소중하게 다루어져야 한다. 이중섭의 청년 시절 미술활동의 흔적은 공모전이나 전시 출품작을 흑백사진으로 여러 장을 인화하여 가족이나 동료들에게 보냈으므로 그나마 남은 대여섯 점의 흑백 사진 속에 남아있다.

 

이중섭이 광복 전에 그린 것으로 여겨지는 그림이라야 흑백사진으로 남은 것, 연필화와 엽서에 그린 그림을 합해 10점이 채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도 이중섭의 화가로서의 됨됨이를 적잖게 짐작할 수 있다. 그 10점 가운데 하나인 이 그림이 전하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달을 맞으러, 일어나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