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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화가 이쾌대의 첫 출품작,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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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나이에 알아챈, 식민지 사회의 운명을 그림으로 남기다

최석태  미술평론가 |

 

 

여자들이 무리지어 앉아 있다. 문지방에 팔꿈치를 얹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여인을 맨 앞에 배치하고, 바로 뒤로 두 손으로 무릎을 세워잡은 여인, 무릎 위로 팔을 겯고 그 위에 고개를 묻고 우는듯한 여인 그리고 그 여인의 머리에 손을 대고 담담한 표정으로 곁에 앉은 여인 등, 여러 여자들의 모습이 그림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들의 뒤로 한 남자가 누워있는 모습이 보인다. 발은 퍼렇게 색이 변해있고 흰 바지를 입은 듯 보인다. 가슴을 드러내고 문이 있는 벽으로 얼굴은 조금 가려진 상태다. 남자의 상태로  보아 이것은 죽음을 곧 앞둔 남자를 두고 슬픔에 빠진 여자들의 모습을 그린 것임을 알 수 있다.

 

여자들이 입은 옷과 머리 매무새 그리고 누운 남자 뒤로 놓인 농으로 보아 당시 조선의 모습을 담은 것이 분명하다. 알파벳으로 이름을 적은 옆에, 서기 연호 뒷자리 두 숫자, 38이라 적은 것으로 1938년에 그린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그림은 일본에서 그려져 일본에서 손꼽히는 공모전에 출품하여 입선을 받은 그림이다. 이런 정보를 알려주는 기록이 담긴 인화사진이 남아있어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전시회가 열리는 날에 참석한 입선자들에게 인화사진을 만들라고 권유하여 제작해주는 업체들이 만든 것이다. 인화사진의 뒷면에는 엽서 형식으로 우표붙이는 곳과 받는 사람 주소 등이 인쇄되어 있다. 댓가에 따라 열장에서 수십장 이상을 만든다.

 

 

위 사진은 부모님을 모시고 살고 있던 형 이여성에게 이중섭이 보낸 인화사진엽서이다. 이 기쁜 소식을 들은 형은 동생에게 축하한다며 입선을 축하한다는 말을 북에다 적어 선물했다. 이여성은 동생이 혼인했을 때도 손수 네 계절을 나타내는 그림을 그려 병풍으로 꾸며서 주었는데, 그것은 아직 남아있다. 

 

 

이쾌대가 일본의 전람회에 출품한 이 그림의 이름은 운명. 그림을 담은 인화사진에 한자로 ‘運命’이라고 적혀 있다. 말모이(사전)에는 이 운명이란 ‘앞으로의 존망이나 생사에 관한 처지, 인간을 포함한 우주의 일체를 지배한다고 여겨지는 필연적이고도 초인간적인 힘. 명운, 숙명’이라고 적혀있다. 나는 아무래도 소리는 같으나 뜻은 다른 ‘殞命’으로 여겨진다. 즉, ‘사람의 목숨이 끊어지는 것. 죽음’ 이라고 생각된다. 뜻이 어쨌건 곧 죽는, 죽음이 확실한 상태의 한 남자를 두고 가족인듯한 여자들이 슬퍼하고 있는 것이다.

 

 

이쾌대가 나고 자란 경상북도 칠곡은 지금은 대구광역시의 한 쪽을 이루고 있는 곳이다. 이 곳 대지주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모자란 것 없이 자란 이쾌대. 이름도 시원시원한 느낌이다. 초등과정을 마치고 서울로 유학하여 보낸 중고시절에는 학교 야구반에 들어가 뛰어 놀고, 그림 그리기에 몰두하다가 일본에 유학한 유복한 인생.

 

얼마나 잘 살았으면, 유학지 도쿄에 집을 지었나 싶다. 직전에 결혼한 아내도 같이 갔다. 형에 이어 누나 둘 그리고 자신은 아버지의 본처인 한 어머니 소생이고 이 밖에도 60명이 넘는 형제들이 있었다고 한다. 몇 년 전에 돌아가신 미술평론가 김윤수 선생님께서 해주신 이야기다.

 

1938년에 이렇게 유복한 환경에 있던 23살 청년이 무슨 일을 겪었기에 이런 그림을 그렸을까? 식민지나 식민지 같은 사회에서는 사연을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이런 일이 늘 벌어진다. 이쾌대가 젊은 시절부터 이런 낌새를 알아 차리고 그렸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쾌대의 형 이여성은 독립운동과 사회운동으로 새파란 시절부터 집을 떠나 중국 상하이나 난징을 떠돌다가, 3.1혁명으로 유리한 정세가 만들어졌다고 판단하고 국내로 들어왔다가 체포되어 옥살이를 했다. 이를 이쾌대는 철들자마자 알아차렸다고 보인다. 또한, 그 이후 일본으로 유학하고 돌아온 형이 우리 역사를 제대로 효과있게 알 수 있으려면 역사화를 제대로 그려 남기는 것이 중요하다며 역사화 연구에 몰두하는 모습도 이쾌대에게 만만치 않게 다가왔을 것이다. 이쾌대 자신이 화가 지망생이지 않던가.

 

우리는 이런 그림이 그려졌음을 1980년대 말에서야 처음 알았다. 월북자라는 이유로 작품은 물론 행적도 알려지지 않았다가,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정부에서 이런 족쇄를 풀었다. 이른바 월북작가 해금 조처였다.

 

이 그림은 전람회에 입선하고, 아마도 광복 직전에 열렸던 개인전에 출품되었다가 오랫동안 숨겨져 있다시피 했을 것이다. 1998년 해금으로 거의 반세기만에 다시 세상에 나온 것이다. 이쾌대의 막내 아들이 오랫동안 다락에 쌓아 두었던 그림들을 손보아서 이듬 해에 전시회를 열었다. 이 전시에서 비로소 처음 알고 듣고 보게 된 이름이 이쾌대다. 우리의 지난 미술 흐름에 이런 작품, 이런 화가가 있었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