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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 조선역사 회화가 이여성의 <격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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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석태 미술평론가 |

 

 

그림의 왼쪽부터 빈 말을 끌고 가는 사람과 그 앞에 흰 말을 탄 사람이 보인다. 흰 말이 고개를 숙이고 멈칫한 사이 말끌기꾼의 시선은 자기 뒤쪽 한무리의 말탄 사람들에게 향해 있다. 맨 앞에 있는 말탄 사람도 시선이 말 달리는 무리에게 향해 있다. 그림의 오른쪽에는 큰 북을 두드리는 두 사람이 보인다. 두 사람의 시선도 그림 중간이 말달리는 무리에게 향해 있다. 이들의 움직임에 맞추어 북을 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전경에 비해 작고 흐릿하게 그려졌으나 이 그림의 중심을 이루는 것은, 모든 등장인물의 시선이 향하는 곳, 바로 말달리는 무리다. 한 손에는 긴 막대가 들려있고, 잘 들여다 보면 붉은 빛의 작은 동그라미 모양을 쫓아 달리는 것임을 알 수있다. 그 뒤로 더욱 옅게 그려진 관중들이 보인다. 그림 제목은 없고 그림의 왼쪽 아래에 그림 그린 사람의 이름과 도장이 찍혀 있다.

 

이 그림은 경기도 과천 경마장에 딸린 마사박물관 소장품으로, 다음과 같이 그림 위에 빼곡하게 적은 기록과 하나로 되어 있다. 

 

 

이 그림을 그린 이여성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낯선 인물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독립운동가 내지 사회연구자,  미술사학자로, 특히 요 근래 조승우, 이병헌, 유지태 등 유명 배우들이 약산 김원봉으로 연기한 영화나 TV 연속 방송에서 여러 차례 다루어지면서 그와 의형제를 맺은 사람으로 인식되었다. 그래서 이여성이 누구인지 좀 더 알아본 사람들에게는 좀 알만한 인물이 되었다. 그는 더하여 화가이기도 하였다. 가히 르네상스맨이었다고 할까?

 

특히 이여성의 원래 이름 건명이 여성으로 바뀌게 된 사연을 들으면 '아, 그 분'이라고 할 것이다. 1918년, 서울 중앙고보, 중등 과정의 끝 무렵에 김원봉, 김두전과 더불어 나라 밖으로 나가 민족해방운동을 하자고 약속한 세 학생이 있었다. 1차세계대전으로 백인들의 치부가 드러나고 러시아 혁명의 성공에 고무된 이 젊은이들이 힘을 모으고, 결의를 굳게 하고자 이름을 바꾸었다. 김원봉의 고모부 황상규가 이들의 이름을 지었는데, 김원봉은 '산처럼'이란 뜻으로 약산(若山), 김두전은 '물처럼'이란 뜻으로 약수(若水), 이건명은 '별처럼'이란 뜻으로 여성(如星)이라고 지어주었다. 이여성의 '여'는 소리는 다르지만 '약산', '약수'의 '약'과 같은 뜻이다. 

 

이여성은 1901년 경상북도 칠곡군 지천면 신동에서 수만석 자산가 이경옥과 윤정렬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뒤로 딸이 서넛 이어지다가 태어난 동생이 훗날의 천재화가 이쾌대다. 어릴 때 호렵도 병풍을 보고 자라서, 말 탄 사냥꾼의 꿈을 키우기도 했다고 한다. 그가 훗날 화가로서도 활동하게 된 까닭에 이런 체험이 깔려있다고 볼 수 있겠다. 또한 오늘 소개하는 그림 <격구도>를 그리게 된 원인(遠因)이 되기도 했다고 하면 무리일까? 

 

이여성은 화가로서는 아직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적어도 일본이 우리를 지배한 시절에 역사화를 그린 사람으로 중요한 인물이다. 조각가로 미술문필 활동으로 꽤 두툼한 책이 되도록 글을 쓰기도 한 김복진이 이여성의 역사화가 지닌 묵직한 의미를 인상 깊게 기록하기도 했다.

 

1937년, 우리 미술계를 돌아보는 글의 끄트머리에 그는 “아직 사회적으로는 공개되지 않았으나 외우 이여성씨가 장대한 계획 밑에 조선 역사의 회화화를 비롯한(시작한) 것을 소개하여야 하겠다"며 운을 떼었다.

 

그의 박식과 윤필은 세칭 범속한 전문가의 지위를 뛰어났으며(뛰어넘었으며) 또 동일이 논할 비례를 가지고 싶지 않다며(비교할 것이 없으며) 그의 성공은 곧 (이)씨만의 영예가 아니다”고 하였다(김복진, 조광, 1937. 12; 김복진전집, 청년사, 1995, 136쪽).  

 

이여성은 왜 역사화를 그리게 된 것일까? 드러내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청소년기를 보낸 시기인 일본 강점 아래, 일본 역사만 가르치는 상황에서 우리 역사를 제대로 알기 위해 기울였던 노력이 역사화로 발전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여성이 기여한 분야로 복식사 연구가 있다. 그는 광복 직후 우리 옷과 장신구를 가리키는 복식에 대한 연구서인 <조선복식고>를  펴냈다. 오랜 기간 관련 연구저서가 없다시피 했던 이 분야 최초의 연구서였다. 이여성이 쓴 여러 편의 복식 관련 글을 눈여겨보던 일본의 한 출판사가 제안해 일본어로 우리 복식사 저서를 완성하였다가, 시국 탓에 발간이 무산되었던 것을 광복 후 우리말로 옮겨 낸 것이다.

 

역사화를 제대로 그리기 위해서는 그 주인공인 사람이 몸에 두른 옷과 치레꺼리를 알아야 했다. 그는 이 책의 서문에서 우리 복식을 연구하게 된 까닭이 역사화를 만들러 가는 길에서 얻어진 한 개의 부산물이라고 했다. 

 

이 그림이 다루고 있는 격구는 흔히 서구권에서 폴로라고 하는 운동의 원조이다. 말타는 유목민들의 운동이다. 이런 운동을 조선왕조 초기인 세종 시대에 경복궁 마당에서 궁안에서 일하는 거의 모든 사람들을 패로 나누어 경기를 치루고, 이기는 무리끼리 다시 경기를 치루는 형태로 무려 두 달 동안이나 펼쳤다는 기록이 있다. 이여성은 이 기록들을 바탕으로 상상해 이 그림을 그린 것이다, 그림 위에 적은 내용은 용비어천가, 경국대전, 무예도보통지 등의 관련 내용을 적은 것이다. 놀랍지 않은가!

 

이여성은 역사적으로 고증한 그림 12점을 남겼는데, 위에서 김복진이 극찬한 바의 예로 들 수 있는 그림 몇 점이 유족이 간직한 사진 몇 장과 당시 일간지에 남아있어 소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