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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람스를 환생시킨 서울국제음악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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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7일(토)~10월 14일(토) 예술의전당

명지의료재단 이사장 이왕준 |

 

그동안 뉴스아트에 전주세계소리축제 <국창열전 완창 판소리>를 연재한 전주세계소리축제 이왕준 조직위원장은 서울과 제천에 종합병원을 두고 있는 명지의료재단 이사장이기도 하다. 우리 소리는 물론 클래식에도 조예가 깊은 이왕준 이사장은 뉴스아트에 다양한 음악 공연 리뷰를 게재하기로 하였다. 이에 이왕준 이사장이 그동안 뉴스아트에 기고한 원고도 한 자리에 모아 <닥터 리의 스테이지 리뷰>라는 메뉴를 만들고, 새로운 연재를 시작한다. 

 

서울국제음악제가 개막했다. 부제는 낭만에 관하여. 개막일과 둘째날 공연을 봤다. 

 

금년에 왜 이렇게 유달리 공연장마다 브람스 레퍼토리로 가득 채워지는지 잘 모르겠다. 굳이 따지면, 브람스가 1833년생이니 금년이 탄생 190주년이라는 것이 이유가 될까? 아니다. 근대 라흐마니노프는 금년에 딱 탄생 150주년이 되었으니 여기저기서 그의 곡을 연주하는게 충분히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지만, 탄생 190주년은 아무래도 뜬금없다.

 


그럼에도 이처럼 너무 심하다 할 정도로 브람스 편식이 생긴 건 공연자와 청중들의 야합(?)의 결과로 보여진다. 특히 해외 유명 교향악단이 내한하면 어김없이 만만하게 들고 가져오는 레파토리가 브람스 교향곡이다.

 

왜냐하면 공연자 입장에선 기본 2관 편성(현 44명 관 19명 타악기 팀파니 하나)으로도 충분히 오케스트라의 기량을 보여줄 수 있다는 편의성이 존재하고, 청중 입장에선 너무 어려운 선곡이면 티켓이 안 팔리니 브람스 교향곡 정도가 그냥 대중적으로 무난한 선곡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기획사가 주도하지 않더라도(?) 만날 브람스를 들을 수밖에 없다.

 
작년 11월 베를린 슈타츠카펠레도 2일간 브람스 교향곡 전곡을 했고 금년 3월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도 2일간 브람스 전곡을 했다. 뿐만 아니라 앞으로 예정된 빈필도 브람스 1번이 있고 베를린필도 브람스 4번을 한다. 

 

심지어 지난주 10/7 런던필도 브람스 1번, 이번주 10/13 파보 예르비와 취리히 톤할레 오케스트라도 브람스 1번, 10/14 서울국제음악제 폐막공연도 브람스 1번이다. 정말 브람스가 환생할 상황이다. 

 

이 가운데 지난주 토요일부터 시작해서 8일간 진행되는 2023 서울국제음악제의 주제가 <낭만에 관하여>이고, 사실상 연주곡의 90프로를 브람스로 만 채운 이번 음악제의 레파토리는 브람스 관련 연주로는 가히 최고가 아닌가 싶다.

 

 

이런 브람스라면 깊어가는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 꼭 찾아 들어야 할 공연이다. 그만큼 이번 축제의 프로그램과 연주자들이 대단하고 공연의 수준이 최고라고 칭찬해 주고 싶다. 특히나 실내악으로만 채워진 4일간의 브람스 향연은 다른 어느 곳에서도 경험하기 어려운 진귀한 프로그램이다.

 

10월 7일 개막공연은 브람스의 여성합창으로 시작했는데, 그것도 두대의 호른과 하프 한대가 반주하는 4개의 노래 모음곡이다. 작품번호 17인데 브람스가 27살에 작곡한 거다. 소프라노 4명과 메조 2명이 부르는 이 여성합창을 나 역시 난생 처음 들었다. 하지만 브람스 노래의 특징은 확연히 느껴진다.

 
잘 안 알려져서 그렇지 원래 브람스는 젊은 시절 그 첫 커리어가 합창음악이었다. 고향 함부르크에서부터 합창단을 지휘하고 합창음악을 편곡·작곡하는 일로 시작했고, 데트몰트에서는 귀부인들로 조직돼 있는 여성합창단 등을 지휘하면서 여성합창곡도 많이 작곡했다. 위에 언급한 작품번호 17도 이때 작곡된 거다.

 
이후 비엔나로 자리를 옮길수 있었던 것도 합창단(Wiener Singakademie)의 지휘자로 초빙되어서이다. 그리고 이 때 이미 <독일 레퀴엠>을 비롯한 다수 합창곡들을 작곡했다. 다시 말해 교향곡 보다 합창곡이 더 앞서 있었다. 사실 브람스는 교향곡 4개에 2개 피아노 협주곡 등등 실제 관현악이 동원된 곡들을 다 합쳐봐야 20개가 겨우 넘을 뿐이다. 

 

이어진 3곡의 실내악이 현악 5중주 1,2번과 현악 6중주 1번이다. 브람스에게서 합창과 성악곡 다음에 큰 비중을 차지하는게 실내악이다. 아니 내 취향으로도 브람스의 최고 걸작들은 모두 실내악에 다 들어 있다.

 

오늘 연주된 브람스 현악 5중주 1번과 2번도 그의 걸작들 중 하나이다. 하지만 이 두 곡을 한꺼번에 연이어 실황으로 들을 기회는 흔치 않다. 하물며 피날레 곡이 나의 브람스 최애곡인 현악 6중주 1번이니, 오늘 10월의 첫 토요일 저녁을 오롯이 연주회장에 헌납하지 않을수 있겠는가?

 


오늘 이 3곡의 연주자 라인업이 엄청나다. 브람스 현악 5중주는 바이올린 2, 비올라 2, 첼로 1로 연주한다. 일반적인 현악 4중주에 비올라 하나가 더 추가된 것이다. 그런데 오늘 현악 5중주 1-2번과 6중주 1번을 두명을 제외하곤 모두 라운드 마다 선수교체(?)를 했다. 토탈 14명이 등장한 것이다. 그것도 모두 대단한 실력자들이니 완전 귀 호강이다.

 

 

오늘 등장한 선수들 중 몇명을 소개하지 않을 수 없다. 먼저 현악 5중주 1,2번의 첼로를 다 맡은 클라우디오 보호르케즈! 페루-우르과이의 피가 절반씩 섞인 47세 중년의 독일 첼리스트이다. 20살에 하노버 국제 콩쿨에서 우승을 하자  크리스토퍼 에센바하가 그를 발탁해서 이후 26년을 음악 파트너로 지내서 유명해졌다. 오늘 들어보니 연주가 참으로 힘있고 알차다. 역시 중심을 잘 잡는다.

 

 

두번째 선수는 현악5중주 1번을 리드한 엘리나 베켈레! 이 여인은 핀란드 출신으로 현재 비엔나 국립음대 교수인데, 금년 4월 오스모 벤스케가 서울시향의 상임지휘자로서 마지막 고별 공연할때 시벨리우스 협주곡 초청 연주자로 왔었다. 그때 오리지널 버전으로 현란한 테크닉과 세련된 음색을 보여주었는데 오늘도 그녀의 바이올린은 참으로 고급지다. 

 

세번째 선수는 백주영이다. 서울음대 최연소 임용기록의 그녀는 왕년에 얼마나 화려한 경력을 소유하였던가? 시벨리우스, 파가니니, 롱티보 등 모든 국제 콩쿨을 다 휩쓸고 유명 오케스트라를 거치면서 동양의 안나 소피 무터라고 칭송되던 그녀가 아이 두명을 출산하고 40대 중반을 훌쩍 넘기면서 다시 무대로 돌아왔다. 이번 서울국제음악제에서도 페스티벌 오케스트라 악장도 하고 사실상 음악감독 같은 일을 한다. 여전히 현란하고 유려한 연주 실력이다. 노장(?)은 건재하다. 역시 최고다!

 

 


둘째날은 피아노와 함께하는 브람스 실내악 곡들로만 이루어져 있다. 브람스 피아노 트리오 2번, 피아노 4중주 2번, 피아노-클라리넷-첼로 3중주, 이렇게 3곡이다. 브람스는 평생 각각 피아노 3중주를 3곡, 피아노 4중주를 3곡, 그리고 피아노 5중주를 한곡 썼다. 대부분 초기, 중기의 작품들이다.

 

 

하지만 가장 특별한 작품은 클라리넷 곡들이다. 모두 말년에 쓰인 걸작들이다. 58세에 클라리넷 3중주와 5중주를 썻고 2년 후 60세에 클라리넷 소나타 2곡을 썻다. 당시 브람스는 거의 창작의욕이 다 소진되었다가 마이닝겐 궁정악단의 클라리넷 수석인 뮐펠트의 연주를 듣고 확 꽂혀서 이후 클라리넷에 푹 빠졌다 한다. 브람스 말년의 인생에 대한 성찰과 그리움이 묻어 있고 우울한 삶의 여정을 체관諦觀한 듯한 감정이 쏟아져 나온다. 수많은 애호가들이 브람스의 원 픽으로 이 클라리넷 5중주를 꼽는다. 

 

오늘 클리리넷을 연주한 조인혁은 현재 한양대 교수로 있지만 왕년 뉴욕 메트 오페라의 종신 수석 자리를 거친 최고의 클라리넷티스트이다. 역시 명불허전이다. 가을 밤 이보다 더 촉촉해지기 어렵다. 

 

 

 

서울국제음악제는 2007년에 시작되었으니 금년이 벌써 15년째이다. 이 음악제에서 예술감독을 맡고 있는 작곡가 류재준의 헌신적 노력이 없었더라면 지금과 같은 내실을 쌓는게 불가능했을 것이다.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이번 주 토요일까지 진행되는 나머지 프로그램도 모두 브람스로 짜여 있다. 이 가을에 다시 한번 브람스의 우수憂愁와 그리움에 젖어보시길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