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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흐보로스토브스키, 김기훈의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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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11월 4일 예술의 전당
바리톤 김기훈 독창회

명지의료재단 이사장 이왕준 |

 

그동안 뉴스아트에 전주세계소리축제 <국창열전 완창 판소리>를 연재한 전주세계소리축제 이왕준 조직위원장은 서울과 제천에 종합병원을 두고 있는 명지의료재단 이사장이기도 하다. 우리 소리는 물론 클래식에도 조예가 깊은 이왕준 이사장은 뉴스아트에 다양한 음악 공연 리뷰를 게재하기로 하였다. 이에 이왕준 이사장이 그동안 뉴스아트에 기고한 원고도 한 자리에 모아 <닥터 리의 스테이지 리뷰>라는 메뉴를 만들고, 새로운 연재를 시작한다. 

 

2021년 영국 BBC 카디프 콩쿨에서 본상 우승을 거머쥐었던 김기훈이 11월 26일 런던 위그모어홀 데뷔 리사이틀 공연을 앞두고 한국에서 예행 연습(?)을 겸한 독창회를 열었다. 예행연습이란 표현이 사대주의적일 수 있으니, 오히려 위그모어홀 공연을 앞두고 한국의 팬들에게 먼저 선보이는 선물 공연이란 표현이 더 적절해 보일수 있겠다. 

 


공연 감상 후기는 간명하다. 공연의 완성도가 기대 이상이었다. 3주 후 위그모어홀 공연 후 <가디언>지 논평에는 또 뭐라고 극찬하는 감상후기가 올라올지 기대가 잔뜩 된다. 런던행 비행기를 타고 가서 그 공연 실황에 동참해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위그모어홀 데뷔 연주 무대는 사실상 카디프 콩쿨 우승의 부상이다. 위그모어홀 공연은 아무나 할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 곳에 서는 건 연주자 측에서 추진하는게 아니고 백프로 위그모어홀에서 기획 공연으로 결정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지난 100여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쌓아놓은 위그모어홀의 레거시이자 권위이다. 김기훈이 우승 후 2년이나 지난 뒤에 스케줄이 잡힌 건 오로지 이 홀의 기본 프로그램이 이미 2년 전에 미리 짜져서 돌아가기 때문이다.


위그모어 홀은 500석이 조금 넘는 실내악 전용 홀인 만큼 독주자와 실내악, 그리고 성악가들의 독창회 데뷔에 있어서는 세계 최고의 무대이자 메카 같은 공연 공간이다. 한국사람들에게 뉴욕 카네기홀은 익숙하니, 그냥 유럽의 카네기홀이다 하면 비슷한 비유가 되겠지만 실제는 여기가 더 서기 어려운 무대이다. 

 

이미 100여년 전에 라벨, 포레, 생상 같은 작곡자들이 직접 위그모어홀 무대에 서기도 했고, 이후 기라성 같은 연주자들의 독주회와 독창회가 전설처럼 기록되어 있다. 우리가 아는 피아니스트와 성악 가수 중에도 여기를 거치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다. 또한 자체로 운영되는 현악4중주 콩쿨은 1979년에 설립되어 3년마다 열리는데 전세계 최고 권위의 콩쿨이다. 또한 자체 성악 콩쿨도 2년마다 진행된다. 최고 연주가들의 공연이 연 400회 이상 열린다. 

 

김기훈은 이번 위그모어홀 리사이틀의 부제를 아예 <오마쥬 to 디미트리 흐보로스토브스키>로 붙였다. 2017년 55세에 세계 최정상의 자리에서 갑자기 뇌종양으로 요절한 흐보로스토브스키야 말로 김기훈이 가장 흠모하는 롤 모델이기도 하지만, 좀 거창하게 얘기하면 이제 본인이 제2의 흐보로스토브스키라는 걸 세상에 천명하는 독창회인 셈이다.

 

흐브로스토브스키는 27살이던 1989년 카디프 콩쿨에서 영국 출신인 브라이언 터펠을 제끼고 우승을 차지했다. 흐브로스토브스키야보다 터펠이 세 살 어리기는 해도, 영국이 종주국이라는 면에서 자존심이 얼마나 상했을지 상상이 간다. 그리고 2년 뒤인 1991년에 필립스 레이블로 흐브로스토브스키의 레코드가 나왔다. 공교롭게도 김기훈도 2021년 우승하고 2년 뒤인 올해 독창회를 한다. 여기에 착안해서일까?


2부의 메인 프로그램이 러시아어로 부르는 라흐마니노프의 <Russian Romances>이다. <Russian Romances>는 위 부제에 의한 연가곡이 아니고, 1991년 발매된 흐브로스토브스키 음반에 수록된 9개 곡들의 모음집 타이틀이다. 그런데 그 음반에는 이 라흐마니노프의 9개 가곡 이외에, 차이코프스키 가곡도 9곡이 더 실려있다. 김기훈은 흐보로스토브스키 음반에 따라 라흐마니노프 가곡 9곡을 부르는 순서도 거의 동일하게 배치했다. 

 

 

라흐마니노프의 9개 가곡 중, 내가 듣기에는 특히 4번 째의 <아름다운 여인이여, 노래하지 마오>가 절창이었다. 러사아의 민요적 멜로디는 물론, 위아래로 가라앉았다 솟구치는 그 감정의 기복을 김기훈이 "죽여주게" 표현했다. 이 표현력에 있어서는 어찌보면 흐보로스토브스키 보다 김기훈이 훨씬 나아 보인다.


김기훈은 클라이맥스에서 두성도 아니고 콧소리도 아닌, 말 그대로 전문용어로 마스케라를 울려내는 시원한 발성을 내지르는데 이게 바로 그의 전매 특허이다. 가슴이 뻥 뚫리는 듯한 그 우렁찬  목소리와 청량감 있는 음색은 바로 이 발성의 특징에 기반한 것이다. 그런 반면에 김기훈의 음색은 흐보로스토브스키보다 더 밝고 따뜻하다. 그래서 김기훈은 아직 스카르피아 같은 악역보다는 오히려 오페라 부파에 더 어울려 보이는지 모르겠다.

 

 

 


오페라 아리아를 연상시키는 6번째 곡 <그리스도 부활하셨네>도 퍽 인상적이었다. 이 작품 26은 교향곡 2번과 함께 라흐마니노프가 35살에 작곡한 것이다. 그가 계속 오페라를 작곡했더라면 아마 이런 스타일의 아리아를 가진 오페라로 발전했으리라! 라흐마니노프는 19살 모스코바 음악원을 졸업하면서 오페라 <알레코>를제출했고, 이후 20대에 2편의 단막 오페라를 더 썼다. 그런데 모두 무대에 잘 올려지지는 않는다. 

 

이번 프로그램의 첫 모두冒頭를 장식한 브람스의 <4개의 엄숙한 노래>는 일반인에게는 잘 안 알려져 있다. 하지만 나는 이 곡을 브람스 가곡 중 최고로 친다. 젊은 시절 나는 이 곡을 항상 피셔 다스카우의 연주로 듣고 또 들었다. 그 시절에는 이 녹음 말고는 발매된 게 아예 없었지만, 브람스 생애에서 마지막으로 작곡된 이 노래가 너무 좋았다. 그야말로 브람스의 ‘백조의 노래’이다.

 

이 4개의 노래 가사는 성서의 ‘전도서’(1,2 곡)와 ‘고린도전서’(4곡), 또 외경(3곡)에서 가져왔다. 그래서 이 곡들을 종종 기독교적인 의미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무지의 소산이다. 브람스가 신학에도 정통했던 사람이었지만 이 곡은 본질적으로 연가戀歌이자 브람스 본인 인생에 바치는 헌가獻歌이다. 

 

브람스는 63세가 되던 1896년 3월 말에 작곡을 시작했는데, 본인이 40여년 동안 흠모했던 스승 로베르트 슈만의 아내 클라라 슈만이 뇌졸중으로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고서이다. 하지만 이 곡이 완성될 무렵인 5월 20일 클라라는 세상을 떠났고 브람스는 겨우 간신히 시신이 매장되기 직전에야 장례식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결국 이 곡은 클라라에게 들려주지 못했고 평생 독신으로 지내며 지근에서 연모했던 클라라 슈만에 대한 마지막 작별가가 되었다. 그리고 1년 후 브람스도 세상을 떠났으니 결국 이 곡은 자신의 일생에 바치는 고별가가 된 셈이다. 그래서 이 곡들은 엄숙한 분위기이지만 본질적으로 너무 슬프고 가슴이 아프다. 

 

김기훈은 오늘 이 모드를 표현하기 위해 시작부터 내내 부동의 차렷자세로 노래를 불렀다. 하지만 마지막 제4곡의 클라이맥스에서는 양 팔을 들어 이 모든 감정을 하늘에 바쳤다.

 
“우리가 지금은/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 보이지만/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볼 것이로되/내가 지금은 온전히 알지 못하지만/그때에는 하느님께서 나를 온전히 아시듯/나도 온전히 알게 될 것이로다/그러므로 이제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이로되/그 가운데에서 으뜸은 사랑이라”

 

 

1부 후반은 3곡의 현대 한국 가곡이었다. 몇 주 후에 위그모어홀에 한국가곡이 불려진다. 레파토리 선정이 절묘하다. 이원주 곡 <연>, <묵향>과 조혜영 곡 <못잊어>이다.  김기훈은 한국 가곡에 대한 선곡 능력도 뛰어나다. 카디프 본선에서의 마지막 곡도 김동환 작곡의 <그리운 마음>이었다. 본인하고 너무 잘 어울리는 곡이다. 

 

이원주 작곡가는 한양음대 출신으로 세일가곡콩쿨 1회 우승자 경력의 재원이다. 정말 세련된 멜로디와 특히 현대적 감각의 피아노 반주 코드 진행은 충분히 세계적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연>은 많이 알려져 있는 곡이지만 <묵향>은 숨은 보배이다. 숨막히게 아름다운 곡이다.

 

<못잊어>의 작곡가 조혜영 역시 한양음대 출신으로 합창음악에 천착하는 발군의 젊은 재원이다. 같은 김소월 시에 붙인 곡이지만 우리는 맨날 김동진의 옛스런 딸림화음, 버금딸림화음 진행에만 익숙해 있다가 갑자기 이 변형된 가락과 코드가 왜이리 세련되고 반가운지 모르겠다. 감동이 두 배 세 배로 배가 된다. 

 

이제까지의 좀 장황한 사설이 김기훈의 역사적인 위그모어홀 데뷔 리사이틀에 조금이라도 양념같은 축복이 되길 바란다. 왜냐하면 세상은 아는만큼 보이고 이해하는 만큼 들리고 공감하는 만큼 기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