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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섭과 샤갈의 민족사랑, <달맞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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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평론가 최석태 |

 

첫 번째 <달맞이>에 이어서 두 번째로 같은 제목으로 다시 그린 그림을 살펴보자. (관련기사 이중섭이 광복 전에 <달맞이>를 그린 이유) 앞서와 마찬가지로 이 그림도 사진으로 인화되어 남은 흑백 도판으로밖에는 볼 수 없다. 원작은 없어진 것이 확실하다.

 

이 그림은 첫 번째 달맞이보다 훨씬 흐릿한 느낌이지만, 그래도 무엇을 어떻게 그린 것인지 알 수 있다. 첫 번째 <달맞이>와 같은 제목으로 비숫한 내용을 그린 것은 맞지만, 이 그림에서는 밝고 어두운 표현이 완전히 없다시피 하다. 그저 평면화된 면과 가는 선으로 구획된 화면을 볼 수 있을 분이다.

 

 

먼저 그림 아래의 오른쪽에 염소 머리인 듯한 형상이 보인다, 염소는 머리를 뒤로 돌려 시선을 그림의 안쪽에 두고 있다. 왼쪽 아래쪽 모서리에 있는 어린아이를 쳐다보는 것일까? 염소의 시선이 닿는 곳에 벌거벗은 남자아이인 듯한 작은 사람이 손을 들고 그림 바깥쪽으로 걸어가는 모습이 보인다.
 

염소와 어린아이 사이는 물이다. 오리 두 마리가 헤엄치는 모습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오른쪽에 있는 오리 한 마리는 첫 번째 <달맞이>에서와 마찬가지로,  기대 누운 사람을 향하고 부리를 벌려 일어나라고 외치는 듯 하다. 연못 왼쪽 그림의 중앙에는 시커먼 느낌의 사람이 누워서 하늘을 쳐다보고 있다. 두 팔로는 커다란 물고기 한 마리를 안고 있다. 염소와 오리 사이로 검은 색으로 길게 솟은 것은 연꽃 줄기인 듯, 따라 올라가면 봉오리와 잎이 보인다.

 

이상이 전경과 중경이라면, 그 뒤 원경으로는 희끄므레하게 작은 집 두 채가 놓인 산등성이가 보인다. 그 왼쪽으로 멀리 나지막한 검은 산봉오리 뒤로 높은 산봉오리가 보인다. 가까운 산봉오리 위에 아주 커다랗고 둥그런 무엇인가가 채 다 그려지지 않은 상태로 애매하게 보인다. 나는 이것이 분명히 달이라고 생각한다.

 

첫 번째 <달맞이> 그림에 등장하는 달은 그림 위쪽에 간신히 보이는 반면, 이 그림의 달은 선명하지는 않아도 밝고 커다랗다. 두 달맞이 그림에 한정하여 보아도 엄청난 변화를 나타내는 것이 분명하다. 다시 말하지만 거의 1년 전의 그림과 달리 밝고 어두운 표현, 즉 명암법은 거의 배제되었다.  

 

또한 첫 달맞이 그림은 어느 나라에서 벌어지는 일인지 모를 느낌이나, 이 그림은 산등성이 안에 다소곳하게 그려진 풀띠집들로 보아 조선땅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는 것이 확연하게 느껴진다. 이것도 엄청난 변화이다. 막연하게 진공을 떠돌던 젊은 화가가 지금, 여기의 발디딜 곳을 찾았다고 할 수 있다.

 

<달맞이2>의 배경은 이중섭의 고향 혹은 자신의 가족이나 친지들이 사는 곳, 즉 조선땅인 듯 보인다. 기대 누운 사람이 두 팔로 안은 물고기가 러시아 태생의 화가 마르크 샤갈을 떠올리게 한다. 중섭과 샤달은 둘 다 자신의 고장, 자신의 문화 전통을 존중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으로 보아도 무리는 아니라고 본다.

 

1941년 4월 제5회 지유텐 출품작이니 1941년 연초에 그려진 듯한 이 그림을 출품한 직후에 일본인 비평가가 미술잡지에 써낸 다음과 같은 평이 주목된다. 이마이 한자부로(令井繁三郎)가 월간 미술전문지 『비노쿠니(美の國)』 1941. 4호에 쓴 글이다.

 

약간의 지식과 이해로도 문학수나 이중섭의 작업이 이 민족의 특성을 훌륭히 발휘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서구 근대 미술 양식에 의해 자라나고 겨우 여기까지의 미로에 도착한 일본 작가들에게는 역으로 문학수나 이중섭의 작업 성격이 하나의 큰 반성의 쐐기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마이 한자부로는 이중섭이 병으로 작품을 많이 내지 않았던 1938년에서 1940년과 이듬해 사이에 출품한 겨우 몇 점의 작품을 보고 이런 판단을 한 것이다. 이런 호평에 힘입은 탓인지 그 후 1942년에서 이듬해인 1943년에는 드디어 문학수와 더불어 회우를 거쳐 회원이 되기에 이르고, 거약의 상금이 딸린 특별상까지 받게 된다.

 

이중섭은 1940년에 그려 출품한 첫 <달맞이>로부터, 사랑에 빠진 여자에게 사나흘에 한 장 꼴로 그림으로만 된 엽서 수십 장을 그려 보낸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 엽서들에 그린 그림들 중에 뚝딱 그려진 것은 거의 없는 듯, 크기는 작아도 복잡한 설정을 제대로 그려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것으로 보인다. 엽서에 그린 그림 몇몇과 이번에 소개하는 그림 <달보기>를 겹쳐보면 이마이 한자부로가 말한 바가 좀 더 또렷하게 그려질 것이라 보인다.

 

참고문헌

 

김영나, 1930년대 동경 유학생들; 전위그룹전의 활동을 중심으로, 근대한국미술논총; 이구열 회갑기념 논문집, 학고재, 1992; 1930년대의 전위 그룹전 연구, 20세기의 한국미술, 예경, 1998에 「次代に 生くる 洋畵家群(二)」(『美の國』 제17권 4호,1941) 66-7쪽 인용한 것을 재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