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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훈의 도전, 시립합창단과 함께 한 베르디 레퀴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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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지의료재단 이사장 이왕준 |

 

(2020년 코로나 판데믹이 시작되면서 모든 저녁 미팅이 사라진 대신 하루가 멀다하고 공연장으로 피정을 갔다. 그리고 또 금년 2월 중순부터 시작된 의료대란이 장기화 국면에 접어들면서 주변의 모든 저녁 미팅이 사라지고 있다. 덕분에 나에게는 다시 공연장 피정 생활이 복귀되는 듯 하다. 3월 들어서는 5일간 매일 음악회에 다녀왔다.)

 

오늘은 3월 7일 목요일 저녁 8시 롯데 콘서트홀에서 있었던 KBS 교향악단 정기연주회 정명훈 지휘 베르디 <Requiem(진혼미사곡)>에 대하여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베르디 <레퀴엠>은 특별히 나의 최애 곡 중 하나이다. 고 1부터 40여년 동안 수백 번도 더 듣고 들었던 곡이다. 젊은 시절에 이미 어느 부분을 내 장례식장에 틀어 놓겠다고 정해 놓았었다. 덕분에 소장한 DVD/CD만 해도 20종이 넘는다. 


정명훈이 서울시향과 한국 가수들로만 해서 베르디 레퀴엠을 한국 초연으로 올린 게 2005년 초 경으로 기억한다. 그때 서울시향의 법인화가 완료되고 초대 예술감독으로 확정된 첫 기념 음악회가 베르디 <레퀴엠>이었다. 맨 앞줄에 앉아 넋을 놓고 감격에 젖어 처음 실황으로 들었던 당시의 기억이 생생하다. 대한민국에서 이 곡이 드디어 우리 사람들 만으로도 되는구나!

 

그 뒤 2013년 베르디 탄생 200주년을 기념해 서울 시향과 함께 정명훈 지휘자가 다시 올린 무대에서는 베이스 사무엘 윤 말고는 모두가 외국인 독창자였다.

 

그런데 이번 베르디 레퀴엠은 KBS 교향악단과 3개 시립합창단(고양, 안양, 하남)이 함께 했다. 국립합창단이나 모테트합창단 같은 주력을 내세우지 않고 시립합창단들 만으로 120명의 콰이어를 구성한 것 자체가 큰 도전이다. 비록 중간 중간 불안한 대목이 스쳐 지나가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훌륭했고 특히 남성 중저음의 효과가 일품이었다. 

 

 

정명훈은 제1곡 Requiem et Kyrie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자비를 베푸소서)을 엄청 느린 속도에 잔잔하면서도 서정적인 선울로 이끌었다. 제2곡의 첫 파트인 Dies irae (진노의 날)와 극적인 대비와 효과를 최대화하기 위한 전략이다. 베르디 오페라 <오텔로>의 최고 지휘자라는 명성에 걸맞게 (과거 DV에서 나온 음반은 베스트 셀러이자 많은 상을 탓다) 정명훈은 진혼 미사곡 전체를 망자를 위한 한편의 오페라로 변모시켰다. 

 

<레퀴엠>은 베르디가 61세가 되던 1874년에 당대 최고의 작가 알렉산드로 만초니의 서거 1주기에 맞춰 작곡되었다. 3년 전 오페라 <아이다>를 완성하고 나서 쓴 곡이니 대략 당시 베르디의 작곡 스타일, 즉 나이를 먹으면서 진화해가는 말기 작품들과의 유사성이 느껴진다. 

 

<레퀴엠>은 총 7곡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중 제2곡은 9파트의 속주로 구성되어 있다. 합창과 함께 4명 독창자의 기량이 돋보이게끔 계속 번갈아 가며 독창-중창이 잘 짜여져 있는데 이 대목들을 내가 가장 좋아한다. 

 

소프라노와 메조가 2중창으로 부르는 2-6의 Recordare (기억하소서)는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여성 이중창이라 할 만 한데, 오늘은 소프라노 박미자와 메조 방신제가 불렀다. 이 이중창에서는 원래 내정되어 있던 서선영이 너무 심한 목감기에 걸려 하루만에 대타로 불려 나온 박미자를 압도하여 방신제가 더 빛났다. 

 

 

2-7의 Ingemisco(저는 탄식하나이다)는 테너 독창이다. 테너 김우경은 이 탄식의 노래를 <아이다>의 아리아처럼 불렀다. 그는 최근들어 감성이 더 깊어지고 목소리도 리릭-스핀토 톤으로 더 쨍하게 빛나고 있다. 훌륭한 가수이다.

 

최후의 클라이맥스는 역시 마지막 곡인 제7곡 Libera me (저를 구원하소서)이다. 후반부로 갈 수록 목이 트인 소프라노 박미자는 레온타인 프라이스에서부터 안나 토모와-신토우까지 다양한 음색의 스펙트럼을 펼쳐 보인다. 마치 <오텔로>의 데스데모나처럼 여리게도 부르지만 <아이다>의 암네리스처럼 처연하게 지르기도 한다. 만 하루 만에 준비없이 무대에 섰다지만 역시 표현력이 최고다. 

 

정명훈 표 베르디 <레퀴엠>도  세월이 흐르니 그 원숙함이 깊어지는 듯 하다. 브라비시모!!

 


Requiem aeternam dona eis, Domine 
(그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시고, 주님)
et lux perpetua luceat eis. 
(또 그들에게 영원한 빛을 비추소서)
Libera me Domine
(그리고 저를 구원하소서, 주님)

 

읽으면 작품 이해에 도움이 될 추가 정보

베르디는 1813년 태어나서 1901년, 87세까지 살았는데 평생 26편의 오페라를 작곡했다. 이를 연대기적으로 보면 26살에 쓴 첫 오페라 <오베르토>를 필두로 37살에 쓴 <스티펠리오>까지 총 15편을 전기작품으로 분류한다.
그리고 이듬해 38살에 쓴 <리골레토>와 연이은 <라 트라비아타>, <일트로바토레> 3부작부터 49살에 쓴 <운명의 힘>까지 7편을 중기 작품이라 한다. 중기 작품에는 최고 걸작인 <시실리아의 저녁기도>, <시몬 보카네그라>, <가면무도회>가 포함된다.
그 다음 좀 건너 뛰어서 54세에 쓴 <돈 카를로> 이후를 후기 작품이라 하는데 사실 딱 4개 밖에 되지 않는다. 58세에 <아이다>, 한참 뒤 73세에 <오텔로>, 그리고 80세에 <팔스타프>이다. <아이다>야 워낙 큰 돈을 받고 강력하게 위촉 받은 곡이었지만, 나머지 <오텔로>와 <팔스타프>는 베르디가 그렇게 장수하지 못했다면 존재하지 않았을 작품들이다.
그래서 61세에 작곡한 <레퀴엠>은 그가 어쩌면 자신의 마지막 망가라 생각하고 썻을, 그러니까 만초니가 아니라 자기자신을 위해 작곡한 진혼곡이라 할 수도 있다. 따라서 작곡 기법도 <아이다>와 <오텔로> 중간에 놓여 있고 <레퀴엠>의 선율이 <아이다>의 아리아들과 많이 닮아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