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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를 먹고 자란 대나무, 양기훈 <혈죽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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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개가 아닌 나라 사랑을 상징하게 된,
민영환의 피를 먹고 자란 대나무 이야기

 

최석태 미술평론가 |

 

지금으로부터 100년도 더 된 1906년 7월 17일, 당시 최고 최대 일간지이던 대한매일신보는 첫쪽 머릿 부분에 <혈죽기>라는 글을 실었다. 한문으로 된 이 글의 시작 부분과 마지막 부분을 현대어로 옮겨보자.

 

아, 이 대나무는 민충정공의 피로구나. 공의 피 묻은 옷과 피 묻은 칼을 침실 뒤 협방에 두고 그 문을 잠근 채 250일쯤 지났더라. 하루는 그 집 사람이 문을 열고 보니 대나무 네 줄기가 마루 틈에서 솟아 자라 있더라. 첫째 줄기는 길이가 3척이 고, 둘째 줄기는 2척, 셋째 줄기는 1척이고, 넷째 줄기는 반척 쯤이니, 모두 네 줄 기 아홉 가지에 41잎이 달렸더라.(---) 공이 유서를 남겨 우리 동포를 깨우쳐 말하기를 나는 죽지만 즉는 것이 아니고, 저승에서 여러분을 돕고자 기약한다고 했으니 어찌 미덥지 않으리오. 생각컨대 우리 이천만 동포 한 사람 한 사람이 이 대나무에 대해서 듣고, 대나무를 보고, 대나무를 가슴에 삭여, 그 충군애국의 혈성血誠을 배양하면, 어찌 독립을 다시 회복하지 못함을 걱정하리오. 아아, 이 일을 힘써야 하리로다.   - 겸곡 생

 

 

그리고는 같은 날 신문의 끝쪽인 4쪽 전체를 대나무 그림으로 채웠다. 신문 전체 크기가 가로 26센티미터에 세로가 40센티미터이니, 적지 않은 크기에 대나무 그림 한 점을 꽉차게 실었던 것이다 (참고 자료 2) 앞에서 나온 혈죽기에서 묘사한 바 있는 그 대나무 그림이다.

 

이것은 분명 사건이었다. 창간한 지 만 2년을 하루 앞둔 시점에 처음으로 그림을 실어 내보내면서 전면으로 낸 것이다. 도대체 혈죽이 무엇이기에 보통은 광고 등을 함께 실었던 면까지 모두 통째로 할애해 실어 보냈을까? 

 

 

 

그림의 오른쪽에 바싹붙여서 위에서 아래로 글을 적었는데, 한자로 되었으니 내용을 현대문으로 옮겨보자. 

 

오른쪽 대나무 그림을 신문사측이 한국 명서(名書; 이름난 서예가라는 뜻이나 이름난 화가라는 뜻도 된다) 양기훈 씨에게 그림으로 그려줄 것을 부탁하여 본보에 인쇄하여 널리 퍼뜨리노니 (충정공의) 충절을 애모하시는 첨군자(僉君子; 여러분이라는 뜻)는 이를 애상愛賞할지로다. 

 

그림 한 켠에 적힌 이 글에 나오는 민충정공이 누구며, 혈죽이라는 놀랄만한 대나무는 무엇인가?

 

무슨무슨 공이라는 이름은 왕조시대에 공을 세운 분에게 사후에 임금이 내리는 명예로운 이름이다. 충정공이라고 한 분은 민영환이다. 그는 당시 왕비의 먼 친척으로 그 일족들이 대체로 욕을 먹고 있는 가운데, 드물게 칭찬을 받았던 인물이다. 그런 그가 1905년, 나라가 거의 일본에 먹힌 지경을 당하여 이를 막고자 몇몇 대신들과 함께 조약 파기를 상소하는 등 갖은 노력을 다했으나 잡혀서 갇히는 등 상황을 타파하기에는 무기력했다.

 

조약을 체결한지 보름 정도 지난 11월 29일 감옥에서 나온 민영환은 죽음으로 항거하는 수 밖에 없다고 여기고 유서 2통을 남기고 단도로 자신의 목을 찔러 자결했다. 그의 나이 45살이었다.

 

 

이 소식과 유서 내용은 곧 여러 신문에 상세하게 보도되어 이를 접한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의 뒤를 이어 전 좌의정, 전 대사헌, 전 참판 등 순절자가 줄을 이었는데, 민영환의 집 행랑에 살던 인력거꾼도 뒷산 소나무에 목을 매 죽었다. 특히 그의 자결은 국권회복을 위한 의병운동과 계몽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외국의 한국사 연구자도 그의 자결이 한국 근대민족주의 운동의 기원이 되었다고 평가하였다.

 

그의 죽음 이후 그와 그의 죽음을 기리는 시가 일간지들에 종종 등장했다. 애국지사나, 학생 그리고 부녀자들도 투고한 것으로 보이지만, 일간지 관계자들도 있었다.

 

이듬해 봄을 지나 여름이 온 때에 놀랄 일이 벌어졌다. 민영환이 순국한 지 8개월째가 되던 7월 초에, 그가 스스로 목을 찔러 죽을 때 입고 있던 피묻은 옷을 보관한 방 마룻바닥 마루널 사이로 대나무가 솟아난 것이다.

 

 

이를 유족으로부터 전해 들은 대한매일신보 관련자는 이튿날인 7월 5일에 1단 기사로 알리면서 제목을 '녹죽자생'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그 때는 아직 단지 신기한 대나무였을 뿐이다. 그냥 당죽이라고 표현한 시도 나왔었다. 그러나 날짜가 지남에 따라 이 대의 이름은 '충정죽'으로 불러지다가 같은 달 12일에 다음과 같이 언급되면서 '혈죽'이라는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민충정의 혈죽을 기념하기 위해 촬영도 하였거니와 화채선령에 참서관 양기훈 씨는 죽본을 화출하고 문장명세에 정삼품 장지연 씨는 죽사를 저술하여 세계에 배포한다 하니 차 민공의 혈죽은 선죽에 유광이라 하더라.   - 겸곡 생, 혈죽광휘 

 

여기서 화채선령이란, 그림을 잘그리는 사람이라는 뜻이고, 문장명세는 글을 잘 쓴다는 뜻이다. 즉, 그림을 잘 그리는 양기훈씨에게 그림을 맡기고 글을 잘 쓰는 장지연 씨에게 글을 맡겨 널리 알리고자 하니, 민영환의 혈죽이 정몽주의 선죽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길 바란다는 뜻이다.

 

대한매일신보 편집진은 사진을 인쇄할 수 없는 상황에서 대안을 마련하여 실행에 들어갔다. 양기훈에게 부탁하여 대나무 그림을 그리도록 하고 신문에 싣기 위해 도상을 나무판에 옮겨 그리고 새기는 작업을 거쳐 드디어 17일에 혈죽기와 더불어 혈죽도를 내보이게 된 것이다. 다만, 장지연은 어떤 사연으로인지 글을 쓰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 열흘 뒤인 27일에는 이 그림을 찬양하는 10절의 시조가 발표된다. 이 가운데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그린이와 이를 그리게 만든 이로 여겨지는 인명이 나오는 마지막 절을 보자.

 

   양석연 자네는 화채선령으로 녹죽모본 담당하고

   박겸곡 자네는 문자명세로 사조제술 담당하고

   황성의 각 신문은 충절을 찬양하여 세계광포 담당하고

 

                                                   - 혈죽가 십절 중 10번째 시조, 대한매일신보, 1907. 7. 27

 

이 글에 나오는 양석연과 박겸곡에 대해 살펴보자. 양석연은 화가 양기훈, 박겸곡은 당시 주필 박은식을 가리킨다. 어느 문학연구자는 양기훈을 대한매일신보 관련 주요인물인 양기탁으로 보고 나름대로 고증해 본 경우도 있었지만, 지금은 문학연구자나 사학자들도양석연이 화가 양기훈이며, 박겸곡은 박은식인지 확실히 알게 됐다. 

 

박은식은 대한매일신보 뿐만아니라 황성신문에서 주필로 열띠게 활약하다가 뒷날 망명하여 말그대로 나라를 잃은 아픔을 쓴 통사와 나라를 찾으려는 투쟁을 쓴 혈사를 쓴 저자이자 임시정부 책임자로 일한 분으로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양기훈은 미술 분야 거의 모든 저술이나 정보에서 1898년에 사망한 것으로 표시되었다. 북한도 다를바 없었다. 최근 들어서야 대략 몰년을 모른다고 표시하거나 1910년대에 사망한 것으로 표기하지만 정확히 언제 어디서 죽었는지도 모른다. 더우기 교과서에 다름없는 여러 저술들에서 거의 제외되다시피 한 상태다.

 

혈죽도 만들기 기획의 주요 인사였으며, 나아가 별도로 혈죽도 판화를 제작하여 널리 퍼뜨리는데 가담하였던 행위 때문에 일본 식민당국자들은 눈에 불을 켜고 주시하지 않았을까? 그리하여 양기훈은 죽은 때도 모르게 되었고, 광복 후 일제에 의해 감추어지거나 지워진 역사를 찾는 작업이 없었으니 아직도 죽지 못한 상태가 아닌가!

 

이 두 양자를 모두 알아서 무슨 이익이 있는가? 앞에서 시기순으로 엇갈려서 소개했지만 박은식의 거듭된 주도면밀한 기획이 없었다면, 양기훈의 의지만으로 혈죽도가 존재했을까? 이른바 개화기, 좀 더 좁혀 나라의 앞날이 바람앞의 등불같았던 시기인 대한제국기에 이루어진 이 광경은 이후 이도영이 대한민보에 발표한 시사만평과 더불어 나라의 앞날을 바꾸고자 '그림으로' 애쓴 이야기로는 더없는 사례다.

 

혈죽도로 인하여 그 뒤 대나무 그림을 보는 대중들의 눈은 달라졌을 것이다. 충절의 상징이던 대가 이 나라와 민족이 처한 상태를 상징하는 것으로 바뀐 것이다. 대나무를 바라보는 시각의 변화는, 몇 십년 뒤 여운형의 동지가 된 화가 김진우가 단도와 같은 날카로운 잎을 가진 대나무 그림을 그림으로써 만개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