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아트 편집부 | 사진작가 이열의 포토 에세이 '느린 인간'이 글항아리 출판사에서 출간되어 문화예술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20여 년간 나무를 주제로 작업해온 작가가 렌즈 너머로 만난 생명들과의 교감을 글과 사진으로 풀어낸 이번 작품은 단순한 사진집을 넘어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성찰하는 철학적 에세이로 평가받는다.
책은 20장의 나무 사진 화보와 41가지 나무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제주의 폭낭나무부터 히말라야의 랄리구라스, 아프리카의 바오밥나무, 이탈리아의 천 년 올리브나무까지 국내외 다양한 지역의 나무들이 등장한다. 특히 작가는 단순히 나무의 외형적 아름다움만을 포착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나무와 함께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함께 담아내어 더욱 깊이 있는 서사를 완성했다.
작가의 나무와의 첫 만남은 유년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수안보에 살던 초등학교 시절, 1시간 이상 걸어야 하는 등굣길 중간에 고목이 우거진 서낭당이 있었다. 어린 이열이 서낭당 제단의 떡과 동전을 가져간 날, 하굣길에 쏟아진 천둥번개와 폭우 속에서 몇 시간을 떨며 서 있었던 기억이 그의 나무 사진가로서의 원점이 되었다. 무서움과 동시에 든든한 존재였던 나무는 그에게 평생의 주제가 되었다.
이열 작가가 나무 사진가로 본격 활동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2012년 양재천 나무 보호 운동이었다. 양재천 둑방길 옆에 작업실을 구한 작가는 어느 날 나무마다 붉은 노끈으로 번호표가 매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인근 보금자리 아파트 이면도로 확장을 위해 모든 나무가 벌목될 예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 그는 즉시 행동에 나섰다.
도로 확장의 효과에 대해 의문을 품은 작가는 서초구 의원을 통해 교통 시뮬레이션 결과를 확인했고, 도로를 넓혀도 교통 흐름이 전혀 개선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에 양재동 시민들과 함께 3개월간 서명운동을 벌여 3천여 명의 서명을 받아 서울시, SH공사, 서초구에 진정서를 제출했다. 동시에 그동안 촬영해온 나무 사진들로 전시회를 기획하여 시민들에게 나무의 소중함을 알리고자 했다.
결국 시민들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 서초구는 이미 끝난 공청회를 재개최했고, 참석한 시민들의 만장일치로 기존 도로 확장안 대신 시민의숲 둑방길 지하로 터널을 뚫는 새로운 안이 채택되었다. 나무들을 지킬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개최한 '푸른 나무' 전시가 그의 본격적인 나무 사진 시리즈의 출발점이 되었다.
이후 작가는 '숲', '꿈꾸는 나무', '히말라야', '올리브나무', '바오밥', '신목 시리즈' 등 다양한 나무 사진 시리즈를 발표하며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해왔다. 밤에 조명을 받아 지구의 주인공이 된 아름다운 나무들의 모습을 포착한 그의 작품들은 전시장에서 많은 관람객들의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작가는 시각예술인 사진의 한계를 절감했다. 아무리 아름다운 사진이라도 그 과정에서 만난 '보여줄 수 없는' 소중한 것들을 담아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신안의 작은 섬에서 팽나무를 촬영할 때 밭에서 일하던 노부부가 들려준 삶의 이야기, 바닷가 마을에서 만난 노인이 들려준 나무와 함께한 청춘의 기억들은 사진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작가는 서문에서 "유한한 삶을 살아가는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소소하지만 따스한 기억들, 누군가와 함께한 뜨거웠던 순간들"이라며 "그 모든 것을 겪고 마침내 남겨진 결정체 같은 빛나는 기억들"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2022년 가을 남해에서 '남해신목' 시리즈를 촬영하며 나무를 '시간의 기억', '인간의 염원을 기록한 기억의 도서관'으로 정의한 그는 이번 책을 통해 그동안 전시장에서는 보여줄 수 없었던 이야기들을 독자들과 나누고자 했다.
책에 등장하는 41가지 나무 이야기는 국내외를 아우르는 광범위한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800년간 기다림을 이어온 볼음도 은행나무, 천 년을 산 제주 왕폭낭, 이순신 장군도 쉬어갔다는 대벽리 왕후박나무 등 우리나라의 역사와 문화가 깃든 나무들부터 아프리카의 바오밥, 히말라야의 랄리구라스, 맹그로브 숲까지 지구 곳곳의 경이로운 나무들이 소개된다.
특히 작가는 나무를 단순히 미적 대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나무를 생명체로 인식하기 때문에 생로병사의 과정에서 겪는 아픔에도 주목한다. 베어진 나무, 뽑힌 나무, 구멍 뚫린 나무들에 대한 이야기도 빠지지 않는 이유다. 이는 나무를 둘러싼 환경 파괴와 개발 논리에 대한 작가의 우려이기도 하다.
중앙대 예술대학 사진학과를 졸업하고 이탈리아 밀라노의 유럽디자인대학에서 사진을 전공한 이열 작가는 광고 사진가로 출발했지만, 전업 작가로 전향하여 자연과 생명을 주제로 한 작업을 지속해왔다. 1998년 '누드가 있었다. 그리고...'라는 첫 개인전으로 시작된 그의 작품 활동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작가는 "나무 없이 한순간도 살아갈 수 없는 인간이 당연히 가져야 할 소중한 마음"이라며 "이 지구의 주인공은 인간만이 아니며, 나무도 이 지구의 주인공"이라고 강조했다. 또한 "나에게 나무는 느린 인간이고, 인간인 나는 빠른 나무"라는 표현으로 인간과 나무의 상호 보완적 관계를 시적으로 형상화했다.
책 출간을 기념하여 6월 20일 저녁부터 7월 6일까지 삼청동 라플란드 갤러리에서 전시가 열린다. 이번 전시에서는 책에 수록된 주요 작품들을 원본으로 만날 수 있으며, 6월 27일에는 작가와의 대화 시간도 마련되어 관람객들과 직접 소통할 예정이다. 작가는 전시 기간 중 방문객들에게 사인도 해줄 예정이라고 밝혔다.
출간 과정에서 작가는 서문을 통해 글항아리 강성민 대표와 정연혜 기획자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작가는 "여러 차례 수정하고 교정하며 책 쓰는 분들에 대한 존경심이 저절로 생겼다"며 출간의 소감을 밝혔다.
이번 포토 에세이는 사진으로는 담아낼 수 없었던 현장의 생생한 이야기들을 글로 기록함으로써 시각 예술의 한계를 극복하고 더욱 완성도 높은 작품으로 거듭났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작가가 직접 경험한 나무와 사람들의 이야기는 독자들에게 자연과 인간의 공생에 대해 깊이 생각해볼 기회를 제공할 것으로 기대된다.
환경 파괴와 기후 변화가 전 지구적 이슈로 대두되고 있는 현시점에서 이열 작가의 '느린 인간'은 단순한 사진집을 넘어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철학적 성찰을 담은 의미 있는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20여 년간 나무와 함께해온 한 사진작가의 진솔한 기록이 독자들에게 어떤 울림을 줄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