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6년 7월, 마흔의 나이로 떠난 민중미술의 거장 오윤. 그가 청년 시절에 새긴 한 벽이, 50년 만에 사라질 위기에 놓였다. 서울 광진구 구의동의 옛 상업은행(현 우리은행) 지점 외벽에 양면으로 새겨진 테라코타 부조. 올해 봄 그 건물이 매매되었고, 늦어도 2026년 8월 초까지 안전하게 해체·이전하지 않으면 작품은 멸실된다.
이에 한국스마트협동조합(예술인협동조합)은 4월 28일, 「오윤 구의동 벽화 시민 청원」을 시작했다. 차기 서울특별시장께 작품의 안전한 해체·보존·이관을 책임져 달라고 청하는, 시민의 이름으로 드리는 청원이다. 마감은 2026년 5월 10일, 목표는 1만 명의 이름이다.
청원의 무게를 가늠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벽을 새긴 사람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그가 어떤 길을 걸어 그 벽 앞에 서게 되었는지, 그 벽 너머에서 어떤 손길로 한국 민중미술의 가장 묵직한 한 줄을 새겨갔는지.

부산의 골목에서 자란 아이
1946년 4월 13일, 부산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다. 소설 『갯마을』, 『메아리』로 한국 문학사에 이름을 남긴 소설가 오영수의 장남, 오윤이었다. 문학적 토양이 비옥한 가정에서 자란 그였지만, 그가 진정으로 매료된 것은 책 속의 세계가 아니라 부산 골목길에서 마주치는 생생한 삶의 풍경이었다.
시장 아주머니들의 억센 웃음소리. 부두 노동자들의 땀 냄새. 골목길 아이들의 거친 놀이. 갯내음과 흙먼지가 섞인 그 모든 풍경이 그의 어린 시선에 깊이 새겨졌다. 훗날 그가 칼끝으로 나무에 새기게 될 형상들은, 이때 이미 그의 마음 한구석에서 그려지기 시작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아버지의 문학이 바다와 갯마을 사람들의 삶을 그렸듯, 아들의 예술 역시 민초들의 삶을 향해 자라나고 있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아버지가 말로 그렸던 것을 아들은 칼로 새기게 된다는 것뿐.
추상이 강단을 지배할 때, 그는 다른 곳을 향해 있었다
1965년, 그는 서울대학교 조소과에 진학했다. 당시 한국 미술계는 서구 모더니즘의 세례를 받으며 추상미술이 대세를 이루던 시기였다. 강단의 빛은 형식 실험과 추상 회화를 향해 있었다.
하지만 오윤은 다른 길을 택했다. 그는 대학 시절부터 민화, 무속화, 불화, 탈춤, 굿 같은 한국 전통 문화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서구 미학을 배우면서도, 그의 눈은 언제나 우리 것을 향해 있었다. 미술관과 화랑이 아니라 시장통과 굿판에. 캔버스의 흰 표면이 아니라 한 사람의 굽은 등에. 그의 관심은 그렇게 가장 낮은 곳을 향해 있었다.
추상의 화려한 형식이 강단을 지배하던 그 시절에, 그가 굳이 굿판의 신명을 들여다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어쩌면 부산 골목에서 자라며 보고 들었던 그 풍경들이, 그를 그곳으로 끌어당겼는지도 모른다.
흙을 다루던 시기
대학 졸업 후 군대에 입대했지만 위장병으로 의병 제대한 그는 경주와 일산 등지의 전돌 공장에서 일했다. 생계를 위한 노동이었지만, 그에게는 노동의 의미를 몸으로 체득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흙을 다루고, 벽돌을 굽고, 노동자들과 함께 땀을 흘렸다.
흙과 손이 만나는 그 감각이, 훗날 그의 작품 속 인물들에 살아 있는 무게를 더했다. 그가 그리는 노동자들이 단순한 도상이 아니라, 등이 굽고 손마디가 굵은 한 사람 한 사람으로 살아나는 이유는 그 시기 그가 그들 사이에 함께 서 있었기 때문이다.
전돌 공장에서 일하던 어느 날, 그에게 한 의뢰가 들어왔다. 상업은행 동대문지점과 구의동지점의 내외벽에 테라코타 부조를 제작하는 일이었다. 청년 작가가 공공미술을 의뢰받기 어려웠던 시대에. 그것도 흙과 노동을 직접 알던 청년에게.

1974, 노동자가 노동자들의 자리에 새긴 벽
1974년, 그가 스물여덟이던 해. 노동자였던 청년이, 노동자들이 매일 드나드는 은행의 외벽에 양면의 부조를 새겼다. 한쪽 면에는 인체의 부조가, 반대 면에는 추상의 부조가. 흙이 굳어 단단해진 자리에 그의 손길이 영구히 박혔다.
지금 사라질 위기에 놓인 작품이 바로 이 벽이다. 청년 작가가 공공미술을 맡기 어려웠던 시대에 만들어진, 한국 공공미술 초기의 흔치 않은 작품. 그리고 그의 작업세계 안에서도 흔치 않은 자리에 서 있는 작품. 이 벽 이후, 그는 평생 다시는 같은 규모의 공공 부조를 새기지 않았다.
은행을 찾는 평범한 사람들이 매일 마주하는 예술. 굳이 미술관에 가지 않아도 길에서 마주칠 수 있는 그림. 그것이 청년 오윤이 추구하던 미술이었다. 50년이 지난 오늘, 그 벽이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의 작은 기적이다.
1979, 그리고 1980년대 — 다른 길을 걸은 민중미술가
1979년, 오윤은 '현실과 발언' 동인의 창립 회원으로 참여했다. 이 그룹은 1980년대 한국 민중미술 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군부독재와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이 심화되던 시대, 이들은 미술이 현실에 개입해야 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오윤은 다른 민중미술 작가들과 조금 다른 길을 걸었다. 많은 작가들이 시위 현장, 노동 쟁의, 사회 문제를 직접적으로 재현하는 데 집중했다면, 오윤은 민중의 삶 속에 내재된 한국 전통의 정신을 발굴하는 데 더 관심이 있었다. 그에게 민중미술이란 현실을 고발하는 것을 넘어, 민중의 삶 속에 살아 숨 쉬는 한국적 미감과 신명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일이었다.
탈춤, 무속, 도깨비, 굿 같은 민속적 소재들이 그의 칼끝에서 다시 살아났다. 그는 서구적 조형미에 길들여진 우리 미술계에 한국적 원형이 무엇인지를 강렬하게 각인시켰다. 그가 새긴 인물들은 가냘프지 않았다. 굵고 거친 선으로 묘사된 그들의 어깨와 다리는, 짓눌린 시대를 견뎌온 사람들의 단단한 무게를 그대로 담고 있었다.
한(恨)과 신명(神明)의 이중주
오윤의 작품을 관통하는 가장 핵심적인 정서는 한국인의 심연에 깔린 한(恨)과 이를 단숨에 깨치고 일어서는 신명(神明)의 조화다. 그의 판화 속 인물들은 결코 나약하지 않다. 굵고 거친 선으로 묘사된 그들의 몸짓, 특히 역동적으로 어깨를 들썩이는 춤사위는 억눌린 현실의 고통을 딛고 일어서는 강인한 생명력을 상징한다.
오윤에게 한은 단순한 슬픔이나 원망이 아니었다. 그것은 역사적 고통을 견뎌온 민중의 집단적 기억이자, 그 고통을 딛고 일어서는 생명력의 원천이었다. 그리고 신명은 그 한을 폭발적인 에너지로 전환시키는 한국인 특유의 정서였다. 굿판에서, 탈춤에서, 농악에서 터져 나오는 그 신명을 오윤은 나무판 위에 칼로 새겼다.
미술 평론가들은 그의 판화를 두고 '칼 맛(knife touch)'이라는 표현을 쓴다. 정제된 선과 개성적이고 활달한 칼질로 이루어낸 오윤 특유의 판화 세계를 일컫는 말이다. 칼 맛이라는 그 짧은 단어 안에, 그가 새긴 한과 신명, 두 정서의 이중주가 담겨 있다.
1986년 7월, 너무 이른 이별
1986년 7월 5일, 오윤은 첫 개인전을 연 직후 간경화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마흔. 잦은 음주와 흡연으로 건강이 악화된 결과였다. 그가 남긴 작품은 100여 점. 짧은 생애 동안 그가 나무판 위에 새긴 칼자국은 많지 않았지만, 그 하나하나가 한국 미술사에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겼다.
자신의 이름을 단 첫 개인전을 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떠났다는 사실은, 그의 죽음에 한층 더 무거운 결을 더한다. 자신의 작품을 한자리에 모아 세상에 처음 펼쳐 보인 직후, 그는 그 자리를 떠났다. 보여주고, 떠났다.
2005년, 정부는 그에게 옥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 2006년에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작고 20주기 회고전 '오윤: 낮도깨비 신명마당'이 열렸다. 그러나 그의 진정한 유산은 훈장이나 전시가 아니라, 그가 나무판에 새긴 민중의 춤사위가 여전히 멈추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가 떠난 지 40년이 가까워온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칼자국은 오히려 더 깊고 선명해진다.

세 가지 일이 이어졌다
올해 봄, 작품이 있는 건물이 매각되면서 모든 것이 사라질 듯했다. 그러나 다음 세 가지 일이 이어지면서 보존의 길이 열렸다.
첫째, 우리은행이 매매 과정에서 매수인에게 작품의 존재를 알려주었다. 그 한 마디가 없었다면 작품은 매매 직후 곧장 철거의 길로 들어섰을 것이다.
둘째, 매수인은 작품의 가치를 알아보고자 직접 국립현대미술관에 문의하고, 오윤 작가 유족의 연락처를 찾아 연락을 보내왔다. 작품을 보존하려는 매수인의 적극적 의지가 없었다면, 시민의 청원도 시작될 자리가 없었다.
셋째, 유족 역시 작품의 보존과 공공 이관을 적극적으로 원해왔다. 작가가 떠난 뒤로도 그의 손길이 시민의 자산으로 살아남기를 바라는 마음. 그 마음이 청원의 가장 깊은 뿌리가 되었다.
한국스마트협동조합은 유족과 마음을 모아 작품의 보존 해체와 공공 이관을 맡기로 했고, 매수인과 작품 반출 동의서를 체결했다. 이제 시민의 손이 더해지면, 작품은 우리의 품으로 돌아온다.
왜 차기 서울시장인가
청원의 수신은 차기 서울특별시장이다. 2026년은 서울시장이 결정되는 해. 새로 결정되는 시장께서 이 작품을 시민의 자산으로 받을 수 있도록, 후보자 등록 전에 시민의 의지를 모아 청원을 전한다. 추진단은 5월 초 「오윤 작품 보존 추진위원회」를 발족할 예정이며, 미술계·시민사회·학계 인사들이 공동 위원장과 위원으로 함께한다.
청원의 형식은 정중하고, 그 내용은 단순하다. 50년을 견뎌온 한 작가의 공공미술 작품을, 서울시민의 이름으로 서울시장에게 부탁드리는 일. 그뿐이다.
40주기, 그리고 8월의 마지노선
2026년은 오윤 서거 40주기이기도 하다. 1986년 7월에 떠난 작가가 남긴 100여 점의 판화는 4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 시대의 가장 아픈 곳을 어루만지며 '함께 사는 삶'을 이야기한다. 그 작가의 거의 유일한 공공미술 작품이, 지금 시민의 이름을 기다리고 있다.
작품이 있는 건물은 올해 8월부터 철거되어 그 자리에 새 건물이 들어선다. 그 과정에서 작품은 사라진다. 시민이 새 서울시장을 뽑고 있는 바로 이 시점, 그리고 작품 해체의 마지노선이 8월 초로 확정된 바로 이 시점. 두 시간이 한곳에서 만나고 있다. 지금 시민의 이름이 모이지 않으면, 50년을 견뎌온 작품이 끝내 사라진다.
서명은 30초
청원 서명은 30초면 끝난다. 성함, 이메일, 전화번호, 거주 지역. 청원의 진행 상황은 입력한 이메일로 정중히 안내된다. 만 14세 이상 시민이 참여할 수 있다.
청원 페이지: https://saf2026.com/ko/petition/oh-yoon
마감: 2026년 5월 10일
칼자국은 지워지지 않는다
오윤이 떠난 지 40년.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칼자국은 오히려 더 깊고 선명해진다. 1980년대의 노동자들이 그가 그린 전단지를 손에 쥐던 그 자리에서, 오늘날의 시민이 그가 새긴 한 벽을 지키기 위해 이름을 모은다. 형태는 다르지만, 손에서 손으로 이어지는 그 행위의 결은 같다.
부산 골목에서 자란 한 아이가 있었다. 그는 자라서 흙을 다루는 청년이 되었고, 노동자가 매일 드나드는 자리에 자신의 손길을 새겼다. 그 뒤로도 그는 평생, 자신이 새긴 그림이 시집 표지에, 노동 현장의 전단지에, 아이들의 동화책에 가닿기를 바라며 칼을 들었다.
"미술은 많은 사람이 나누어야 한다." — 오윤
그가 평생을 두고 외쳤던 이 한 문장이, 40년의 시간을 건너 시민의 이름을 부르고 있다. 그리고 시민의 이름이, 그가 청년 시절에 새긴 한 벽을 다시 우리의 품으로 돌려놓을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