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세월을 길어 올린 박옥수의 '시간여행'

URL복사

 

박옥수의 ‘시간여행’ 사진전이 지난 5월4일부터 9일까지  ‘인사아트프라자’ 2층 전시실에서 열린다. 사진가 박옥수의 초창기 사진으로 1965년부터 80년까지의 시대상을 생생하게 기록했다. 작품으로서의 가치 뿐 아니라, 중요한 근현대 사료로서의 가치도 지녔다.

 

 

박옥수는 고교시절부터 사진가로 두각을 드러냈고, 대학 시절에는 고(故) 이형록 선생이 이끄는 '현대사진연구회’에서 활동했다. 1950년대에서 70년대 초반까지의 한국사진사에서 '신선회', '살롱 아루스', '현대사진연구회'로 이어지는 사진 그룹 활동은 리얼리즘 사진에 대한 자각과 새로운 사진 이념이 생성된 중요한 시기였다. 정범태, 이해문, 한영수, 전몽각, 황규태, 박영숙 등 기라성 같은 사진가들이 활동한 '현대사진연구회'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도 고(故) 이경모선생의 추천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그 이후 대학을 졸업한 후, 사진가 문선호 선생 휘하에 들어가며 광고사진가로 변신한 후 현대자동차 홍보실에서 일하기도 했다.

 

 

그는 개인전은 하지 않았다. 가끔 단체전에 내놓은 작품도 리얼리즘 사진보다 서정적인 풍경이 주를 이루었다. 초창기 작품을 본 것은 83년 고(故) 문선호씨가 주도한 ‘한국현대사진대표작'전에 내놓은 미사에서 지휘하는 장면과, 2005년 ’민사협‘에서 주최한 ’시대와 사람들‘전에 내놓은 국립묘지에서 통곡하는 유족들 모습이 전부였다.

 

 

 

2009년 ‘민사협’에서 주최한 ‘한국현대사진60년’전을 비롯한 여타 단체전에 발표한 작품들은 조형적이거나 서정적인 내용이 주를 이루었기에 리얼리즘 사진을 집중적으로 찍은 사실은 전혀 몰랐다. 2017년 토탈스튜디오를 그만둔 후 페이스북에 올라온 60-70년대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란 것이다.

 

 

그 소중한 자료를 반세기 동안 깔아뭉갠 이유가 궁금했다. 상업사진에 전념하느라 정리할 여유가 없을 수도 있겠지만, 스튜디오를 그만두기 전에는 할 일 없이 시간 보내는 것도 여러 차례 보았기 때문이다. 그가 스승으로 모셨던 이경모 선생도 역사적인 여순사건의 중요한 원판을 긴 세월 묻어 둔 사실이 있지않은가. 1994년 ‘눈빛출판사’ 이규상 대표가 먼지 쌓인 필름을 끌어내어 ‘격동기의 현장’이란 사진집을 출간해 세상을 놀라게 한 것이다.

 

 

어쩌면 객관적인 기록보다 작가의 주관을 중시하는 시대적 변화에 따른 가치관의 변화인지도 모르겠다. 추측컨데, 그 사진들을 찍을 당시에는 고(故) 임응식선생이 내세운 생활주의 리얼리즘이 주도할 시기였다. 한국사진의 주류로 급부상한 ‘생활주의 리얼리즘’은 작가의 자기모순과 공모전용 걸작 사진 위주의 획일화라는 부정적인 영향도 미쳤다. 그러나 이형록 선생을 필두로 한 현대사진연구회에서는 생활주의 리얼리즘 사진의 형식적 한계를 벗어나 조형성을 강화한 사진도 더러 나왔는데, 그런 영향을 받은 건 아닐지 모르겠다.

 

 

그리고 한국사진사의 흐름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 당시는 모든 게 공모전으로 평가받던 시기였다. 사진가의 주관은 둘째 문제고 오로지 눈에 튀는 사진이 우선이었다. 원근감과 안정감을 주는 사진 구도같은 것을 따지기도 했고, 내용보다 형식에 치중한 공모전 사진의 길을 걷지 않은 원로 사진가가 과연 몇 명이나 있겠나? 망원렌즈를 낀 고등학생 시절 모습을 보니, 마치 이미지 사냥꾼 같은 공모전의 추억이 떠올랐다. 다큐멘터리 사진은 대상과 부딪혀야 하고, 잘못된 사회를 개선하는데 이바지해야 한다는 허망한 이치를 아직도 버리지 못했지만....

 

 

대부분의 공모전은 ‘한국사진작가협회’에서 주관했는데, 세월이 반세기가 흐른 아직까지 공모전으로 장사하며 회원 늘리는 데 급급하고 있다. 이젠 사진작가라 불리는 회원이 만 명을 넘는 공룡집단이 되었지만, 제 돈 쓰며 취미생활 한다는데 누가 말릴 수 있겠는가? 원로 사진가 중 주명덕, 강운구, 황규태 등 몇 몇 사진가만 사진 협회에 가담하지 않았지, 대부분의 원로들이 '한국사진작가협회' 고문이나 자문위원을 거쳤다.

87년 '민족사진가협회'가 창립되면서 대학교수를 비롯한 프로 사진가들은 대부분 빠져나왔지만, 그 구태는 여태 바뀌지 않았다. 희대의 살인마 이동식이가 죽어가는 모습을 찍기 위해 이발사에게 독약을 먹인 사건도 그러한 공모전이 원인이었다.

 

 

하기야! 공모전만이 아니라, 좋은 작품을 선택하기 위해서는 남의 의견을 듣거나 고르는 과정도 거쳐야 한다. ‘시간여행’ 사진집을 출판하기 위해서도 많은 사진 원고에서 골라낸 출판사 편집자가 있었고, 출판사에서 골라낸 수많은 사진 중에 전시작으로 선택한 것도, 다 같은 맥락이 아니겠는가?

 

 

1991년 무렵, 민속학자 심우성선생과 교류하며 '탈'을 소재로 열었던 전시 외에는 개인전도 하지 않았고, 개인 사진집도 출판한 적이 없다. 그런데, 느닷없이 ‘눈빛출판사’에서는 ‘시간여행’을, ‘개마서원’에서는 ‘뚝섬’이라는 사진집을 각각 출판하며 대규모 전시를 마련한 것이다.

 

 

새 아파트가 즐비한 배경으로 쓰러질 듯 자리를 지킨 청계천 판자촌과 물지게를 지고 위태롭게 물을 건너가는 소녀들이 있는가하면, 창경원에서 휴대 전축을 틀어놓고 춤추는 젊은이도 있었다. 우산을 쓰고 물 구경 하는 가족의 정겨운 뒷모습이나 파월용사 묘역에서 울부짖는 여인들을 보며 지난날을 회억했다. 수많은 사연이 세월을 거슬러 올라 다시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이다.

 

 

박옥수의 ‘시간여행’은 기자들이 찍는 현장 사진과 달리 평범한 일상으로, 그 시기의 시대상과 사회상을 가감 없이 보여주고 있다. 산업사회로 진입하는 60년대는 전통으로 지켜 온 우리의 문화가 서서히 뒷전으로 밀려나기 시작한 시기로, 서민들의 삶은 고단하기 그지없었다. 박옥수의 눈으로 기록된 풍속의 리얼리티가 현실감 있게 드러난 사진에는 절망 속에서 살아온 우리 삶의 흔적이 질퍽하게 엉겨 있었다. 안정적이고 단순한 앵글로 주제를 부각시킨 그의 사진은 한국사진의 전통적 형식에 다름아니다. 아마 전통적 사진을 배우고 익힌 마지막 세대라고도 할 수 있겠다.

 

 

 

박옥수의 시간여행을 보며, 그때 그 시절을 떠올린다.

힘들었어도 그때가 그립다.

 

사진, 글 / 조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