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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 재난의 폐허 위에 ‘치유의 씨앗’을 심다… 이익태 작가, 영원한 자연으로 회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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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한국 최초 독립영화 ‘아침과 저녁 사이’로 전위의 포문을 열다
광주항쟁, LA 폭동, 분단… 시대의 아픔을 ‘행위’로 씻어낸 샤먼
말년엔 캔버스 대신 한지와 바람을 택한 ‘무위(無爲)의 예술가’
7일 향년 78세로 별세… “예술은 보이지 않는 세계의 번역”

뉴스아트 편집부 |

 

나는 오랫동안 의미와 상징이라는 무거운 짐을 표현하려고 낑낑거렸다… 이제 형태나 의미를 포기하자 마음이 가벼워졌다. 나는 없다. 한 줄기 바람, 한 방울의 물 속으로 사라진다.

(고인의 작가노트 중)

 

한국 현대예술의 가장 뜨거운 전위(前衛)에 섰던 ‘토탈 아티스트’ 이익태 작가가 7일 오후 6시, 78년의 소풍을 마치고 영면했다. 그는 영화, 연극, 퍼포먼스, 회화의 경계를 무너뜨리며 오직 ‘삶’이라는 거대한 캔버스 위에서 춤추듯 살다 간 자유인이었다.

 

 

■ 한국 영화사의 ‘돌연변이’, 제도권에 저항하다

 

1970년, 서울예술대학에 재학 중이던 청년 이익태는 한국 영화사에 전무후무한 ‘사건’을 일으킨다. 그가 연출하고 출연한 단편영화 「아침과 저녁 사이」는 기승전결이라는 기존 영화 문법을 철저히 파괴한 작품이었다. 한국영상자료원에 ‘최초의 한국 독립영화’로 등재된 이 작품은 2015년 영국 테이트 모던에서 상영되며 그 전위적 가치를 세계적으로 인정받았다.

 

 

그의 예술적 기질은 안주하지 않음에서 비롯됐다. 1970년대 방태수, 김구림 등과 함께한 전위예술 그룹 ‘제4집단’ 활동은 기성 예술계의 엄숙주의에 대한 유쾌한 도발이었다. 그는 멈춰있는 그림 대신 살아 움직이는 ‘행위’를 택했고, 밀실의 예술을 광장으로 끌어냈다.

 

■ 이방인의 땅에서 올린 씻김굿, ‘재난의 리사이클링’

 

도미 후, 이익태의 예술은 시대의 비극과 정면으로 마주했다. 1980년대 뉴욕과 L.A를 거점으로 활동하며 창단한 퍼포먼스 그룹 ‘Theater 1981’을 통해 그는 조국의 아픔을 노래했다. 광주민주화운동의 희생자들을 위로한 「곡(Wailing)」 시리즈는 단순한 공연이 아닌, 타국에서 올린 간절한 씻김굿이었다.

 

 

1992년 L.A 폭동은 그에게 또 다른 전환점이 되었다. 그는 불타버린 한인 타운의 잔해, 깨진 술병과 녹아내린 집기들을 전시장으로 가져왔다. 대형 퍼포먼스 「볼케이노 아일랜드」는 인종 갈등이라는 ‘휴화산’ 위에서 살아가는 소수민족의 설움을 날것 그대로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는 절망에 머물지 않았다. 폐허가 된 전시장 바닥에 흙을 깔고 잔디 씨앗을 심었으며, 싹이 돋아나는 과정을 통해 ‘재난의 리사이클링(Recycling)’, 즉 예술을 통한 치유와 회복을 증명해 보였다.

 

 

이어 1995년 선보인 「허깅 엔젤스」는 봉제 공장에서 버려진 자투리 천들을 엮어 다양한 인종과 계층을 하나로 묶었다. 실제 노숙인들을 퍼포먼스의 주체로 참여시키고, 마지막엔 관객들과 족발과 김치를 나누며 춤을 췄던 이 작품은 예술이 어떻게 사회적 갈등을 봉합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화합의 장’이었다.

 

■ 얼음으로 녹여낸 분단의 벽, 그리고 ‘빙벽’

 

 

1999년 귀국 후, 그는 분단된 조국의 현실에 주목했다. 「빙벽(Ice Wall)」 시리즈는 그의 예술 인생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무모하리만큼 순수한 열정이 투영된 작업이었다. 서강대교와 통일대교의 차선을 막고 380여 개의 노란 얼음 블록을 세웠다. 그는 이 얼음들을 강물에 밀어 넣으며, 얼음이 물에 녹아 바다로 흘러가듯 남북의 경직된 긴장이 해소되기를 기도했다. 막대한 사비를 털어가며 한여름의 뙤약볕 아래 얼음을 세우던 그의 모습은, 불가능해 보이는 꿈을 꾸는 예술가의 초상 그 자체였다.

 

■ “우리는 모두 피에로”… 자연으로 돌아간 거장

 

그대에게 꽃을, 아크릴, 한지, 50x50cm

 

노년에 접어든 이익태 작가는 거대한 담론 대신 내면과 자연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스스로를 “먼지 낀 거울 속에서 웃는 피에로”에 비유했다. 「피에로」 시리즈 속 원색의 광대들은 사회적 가면 뒤에 숨겨진 인간의 고독과 슬픔, 그리고 삶의 아이러니를 담고 있다.

 

그는 붓을 쥐는 힘을 내려놓고 바람과 비에게 자리를 내어주었다. 마당에 한지를 펴고 물감을 뿌린 뒤, 자연의 바람이 나뭇잎을 떨어뜨리고 비가 무늬를 만들게 두었다. 「아이쿠(Haiku)」와 같은 먹그림 작업은 그가 도달한 ‘무위(無爲)’의 경지였다. “그리는 그림에서 스스로 그려지는 그림으로 흘러가고 있다”던 그의 말처럼, 그는 인위를 배제하고 자연의 물성 그 자체에 천착했다.

 

■ 예술보다 삶을 사랑했던 사람

 

고인은 생전 “예술가는 보이지 않는 세계의 번역자”라고 정의했다. 그는 자본주의에 잠식된 현대 미술 시장의 세태를 안타까워하며, 후배들에게 “유명해지기보다 너 자신의 이야기를 하라”고 조언했다. 예술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예술을 통해 삶이 풍요로워지고 사랑이 넘치는 세상을 꿈꾸었던 휴머니스트였다.

 

 

평생의 예술적 동반자였던 아내 배경애 님과 함께 춤을 추고(「먼지춤」), 친구 정지영 감독과 영화 이야기를 나누며, 78세의 나이에도 소년처럼 웃던 이익태 작가. 그는 이제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흙과 바람, 그리고 별이 되어 우리 곁에 남았다.

 

고인의 빈소는 서울 뉴타운장례식장 8호실에 마련됐다. 발인은 12월 10일 오전 8시, 장지는 벽제승화원이다.


[장례 일정 안내]

  • 고인: 이익태 (향년 78세)
  • 상주: 배경애 (배우자)
  • 빈소: 뉴타운장례식장 8호실 (서울특별시 성북구 종암로 199)
  • 임종: 2025년 12월 07일 (일) 18시 00분
  • 입실: 2025년 12월 08일 (월) 09시 00분
  • 입관: 2025년 12월 09일 (화) 13시 00분
  • 발인: 2025년 12월 10일 (수) 08시 00분
  • 장지: 벽제승화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