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스아트 편집부 | 한국 예술계에 큰 족적을 남긴 예술가가 세상을 떠났다. 2025년 12월 7일 저녁, 차가운 겨울바람 속에 비보가 전해졌다. 한국 독립영화의 시초를 열었고, 평생을 전위(Avant-garde)의 최전선에서 치열하게 싸웠던 이익태 작가가 향년 78세를 일기로 영면했다.
“나는 오랫동안 의미와 상징이라는 무거운 짐을 표현하려고 낑낑거렸다… 이제 형태나 의미를 포기하자 마음이 가벼워졌다. 나는 없다. 한 줄기 바람, 한 방울의 물 속으로 사라진다.”
말년에 그가 남긴 작가노트처럼, 그는 이제 붓을 놓고 그토록 갈망하던 바람과 물이 되어 자연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가 남긴 족적은 너무나 깊고 선명하여, 쉽게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 2023년의 겨울, 그가 보여준 날것의 고통 ‘피멍’
시계를 3년 전인 2023년으로 되돌려본다. 한국스마트협동조합이 주최한 ‘씨앗페(Seed Art Festival)’의 오프닝 현장. 축제의 시작을 알리는 팡파르 대신, 광장에는 숨 막히는 침묵과 긴장감이 감돌았다.
이익태 작가가 총괄 기획한 퍼포먼스 <피멍>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검은 옷을 입은 퍼포머 배경애 작가가 등장했다. 그녀의 등에는 자기 몸집만 한, 아니 그보다 더 커 보이는 거대한 돌덩이가 얹혀 있었다. 그 돌의 무게에 짓눌려 퍼포머는 직립보행을 포기했다. 그들은 차가운 바닥에 엎드려, 짐승처럼, 혹은 벌레처럼 기어가기 시작했다. 거칠게 내뱉는 숨소리와 바닥을 긁는 소리만이 광장을 채웠다.

배경애 작가가 무거운 돌을 끊임없이 굴리거나 지고 가는 행위는 그리스 신화의 시지프스(Sisyphus)를 연상시켰다. 산 정상으로 바위를 밀어 올리면 다시 굴러떨어지는 형벌을 영원히 반복해야 하는 시지프스처럼, 예술가들 역시 작품을 완성하고 나면 다시 생계와 창작의 고통이라는 원점으로 돌아오는 부조리한 현실을 은유하는 듯 했다.

정장을 차려입은 퍼포머 김희성이 주위를 배회한다. 그는 돈가방을 들고 이곳저곳에서 자세를 취하고 행동을 하는 시늉을 할 뿐 고통스러워 하는 배경애 작가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는다. 자본과 금융이 예술가를 대하는 태도를 떠올리게 한다.

그들의 뒤로 펄럭이는 현수막에는 ‘예술’, ‘꿈’, ‘낭만’ 같은 단어 대신 ‘돈’, ‘밥’, ‘쌀’, ‘희망’이라는 원초적이고 절박한 글자들이 적혀 있었다. 예술가들을 옥죄고 있는 현실적인 키워드들이었다. 그것은 예술적 오브제이면서도 생존의 비명이기도 했다.

그 곁에 검은 우비와 중절모를 쓴 이익태 작가가 서 있었다. 그는 긴 지휘봉을 들어 바닥을 내리치며 퍼포먼스를 지휘했다. 그의 눈빛은 매서웠고, 동작은 단호했다. 그는 마치 지옥도(地獄道)를 지휘하는 마에스트로처럼, 예술가들이 처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전시하고 있었다. 그는 이 고통스러운 현장을 기록하고, 지시하며, 때로는 그 고통의 목격자로서 존재한다.
그가 보여준 ‘피멍’은 은유가 아니었다. 그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난한 예술가’로 산다는 것의 실체였다. 퍼포머가 짊어진 무거운 돌은, 불규칙한 수입과 4대 보험 미가입이라는 굴레 속에서 예술가들이 짊어져야만 하는 ‘감당할 수 없는 부채’와 ‘신용 불량’의 무게였다. 땅을 기어가는 행위는, 금융 시스템에서 철저히 소외되어 최소한의 인간적 존엄조차 지키기 힘든 처참한 현실에 대한 고발이었다. 겉으로는 화려해 보일지 몰라도, 그 속은 생계의 위협, 창작의 고통, 사회적 무관심 등으로 인해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음을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퍼포먼스였다.
작가는 “예술은 고상하고 아름다운 것”이라는 환상을 깨부수고, “예술가의 속은 돈 걱정으로 시퍼렇게 멍들어 있다”고 웅변했다. 그날 그가 지휘봉으로 내리친 것은 바닥이 아니라, 예술가의 고통을 외면해 온 우리 사회의 무심한 심장이었다.
■ 경계를 허물고 시대를 껴안았던 ‘토탈 아티스트’
이익태 작가의 삶은 늘 그랬다. 그는 안주하지 않았다. 1947년생인 그는 1970년 서울예술대학 재학 시절, 한국 영화사 최초의 독립영화로 기록된 「아침과 저녁 사이」를 만들며 파란을 일으켰다. 기성 영화 문법을 거부한 이 작품은 훗날 영국 테이트 모던에서 상영될 만큼 전위적 가치를 인정받았다.
청년 시절 ‘제4집단’ 활동을 통해 기성 예술계에 저항했던 그는, 도미(渡美) 후에도 멈추지 않았다.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의 비극을 주제로 한 「곡(Wailing)」 시리즈를 미국 땅에서 공연하며 타국의 동포들과 함께 울었고, 1992년 L.A 폭동 때는 불타버린 상점의 잔해를 가져와 「볼케이노 아일랜드」를 선보이며 인종 갈등의 참상을 고발했다. 1999년 귀국 후에는 서강대교와 통일대교를 막고 수백 개의 얼음을 세우는 「빙벽」 시리즈를 통해 분단의 아픔을 녹여내고자 했다.

그의 예술은 언제나 시대의 아픔이 있는 곳, 재난의 현장에 있었다. 그는 상처를 외면하지 않고, 그것을 가장 전위적인 방식으로 드러내어 치유(Recycling)하고자 했던 ‘이 시대의 샤먼’이었다.
■ 그가 남긴 유산, ‘씨앗페 2026’이 구현한다
말년의 그는 캔버스를 버리고 자연으로 돌아가 한지와 바람으로 그림을 그렸다. “의미와 상징을 포기하자 마음이 가벼워졌다”던 그는, 그러나 ‘후배와 동료 예술가들의 생존’이라는 마지막 짐만은 내려놓지 못했다. 그가 2023년의 씨앗페에서 <피멍> 퍼포먼스를 기획한 이유도 바로 그것이었다.
그는 한국스마트협동조합이 추진하는 ‘예술인 상호부조 대출’ 기금 마련의 필요성을 누구보다 절감했다. “예술가들이 서로가 서로의 담보가 되어주는” 이 금융 안전망이야말로, 후배들이 자신이 짊어졌던 그 무거운 돌을 조금이라도 덜어낼 수 있는 길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고인은 떠났지만, 그가 뿌린 연대의 씨앗은 여전히 살아있다. 오는 2026년 1월 14일부터 서울 인사아트센터에서 열리는 ‘씨앗페(SAF) 2026’은 이익태 작가의 유지를 잇는 자리다. 이번 행사를 통해 모이는 수익금과 후원금은 예술인들을 위한 상호부조 대출 운영기금(Seed Money)으로 적립된다.
이익태 작가가 작품을 통해 호소했던 그 간절함이, 이제는 후배 예술가들과 시민들이 손을 맞잡는 거대한 연대의 물결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 영원한 안식을 기원하며
“예술은 보이지 않는 세계의 번역이자, 삶 그 자체”라던 고인의 말씀이 우리에게 남았다.
이제 그는 더 이상 무거운 돌을 지지 않아도 된다. 그토록 사랑했던 아내 배경애 님과 함께 추었던 ‘먼지춤’처럼 자유롭게 춤추시길 바란다. 한 줄기 바람이 되어, 한 방울의 물이 되어, 우리 곁에 영원히 머물러주시길.
고인의 빈소는 서울 성북구 뉴타운장례식장 8호실에 마련되었다. 평생의 벗이었던 정지영 감독 등 문화예술계 동료들이 그의 마지막 길을 배웅한다. 발인은 12월 10일 오전 8시, 장지는 벽제승화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