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 어머니란 말보다 더 편하고 정겨운 말은 없을 것이다. 어깨를 토닥이며 불러주던 자장가로 꿈꾸던 행복은 아련한 그리움으로 되살아난다. 말만 들어도 코끝이 찡해지는 엄마를 형상화한 이명복의 ‘어멍’전이 어버이날에 맞춘 지난 5월4일부터 17일까지 열렸다. 몇 달 전 정영신의 ‘어머니의 땅’ 사진전이 열렸던 ‘나무화랑’에서 다시 그 감회에 빠져든 것이다.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사연 없는 이가 어디 있겠냐마는 어머니를 생각하면 잊을 수 없는 가슴 떨리는 일부터 생각난다. 낙동강 전투의 최후 보루인 내 고향은 피비린내 나는 전장의 한복판이었다. 내 나이 세 살 때였으나 겁에 질려 울지도 못했다. 포화가 잠잠할 즈음,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살던 집을 찾아 나섰다. 유엔군이 진을 친 남산 아래 미나리꽝 뚝길로 지나칠 무렵, 피 흘리며 쓰러진 군인이 ‘물, 물, 물”이라 외치며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움켜잡았고, 옆에 선 군인은 그냥 가라며 총부리로 위협했다. 겁에 질린 어머니가 간신히 군인의 손을 뿌리치기는 했으나 뒤에서 총을 쏠까 염려되어 등에 업힌 나를 가슴에 끌어안고 뛰셨는데, 어머니의 온몸은 땀으로 흥건히 젖어 흘렀다. 그때 느꼈던 어머니의 거친 숨결 속의
박옥수의 ‘시간여행’ 사진전이 지난 5월4일부터 9일까지 ‘인사아트프라자’ 2층 전시실에서 열린다. 사진가 박옥수의 초창기 사진으로 1965년부터 80년까지의 시대상을 생생하게 기록했다. 작품으로서의 가치 뿐 아니라, 중요한 근현대 사료로서의 가치도 지녔다. 박옥수는 고교시절부터 사진가로 두각을 드러냈고, 대학 시절에는 고(故) 이형록 선생이 이끄는 '현대사진연구회’에서 활동했다. 1950년대에서 70년대 초반까지의 한국사진사에서 '신선회', '살롱 아루스', '현대사진연구회'로 이어지는 사진 그룹 활동은 리얼리즘 사진에 대한 자각과 새로운 사진 이념이 생성된 중요한 시기였다. 정범태, 이해문, 한영수, 전몽각, 황규태, 박영숙 등 기라성 같은 사진가들이 활동한 '현대사진연구회'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도 고(故) 이경모선생의 추천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그 이후 대학을 졸업한 후, 사진가 문선호 선생 휘하에 들어가며 광고사진가로 변신한 후 현대자동차 홍보실에서 일하기도 했다. 그는 개인전은 하지 않았다. 가끔 단체전에 내놓은 작품도 리얼리즘 사진보다 서정적인 풍경이 주를 이루었다. 초창기 작품을 본 것은 83년 고(故) 문선호씨가 주도한 ‘한국현대사진대표작'
누군가는 고향은 도시인들이 잃어버린 낙원이라고 한다. 내 유년시절의 고향은 순수함의 공간 그 자체였다. 지금 내 고향은 오라는 이도, 가라는 이도, 기다려주는 이도 없지만 내 존재의 모태임을 인식하게 된다. 내가 어렸을 때 가을걷이의 꽃은 쌀농사였다 나락을 베고 난 논에 이삭 하나라도 떨어져있는지 달이 환하게 뜨는 날, 온 식구가 논에 가서 벼이삭을 주웠다. 난 검정고무신을 신고 도레미파솔라시도를 부르며 살포시살포시 밟아가며 달빛에 비치는 논바닥을 훑으면 손안에는 제법 나락이 쥐어져 있었다. 그 당시 농촌은 쌀이 곧 삶이었던 시대였기에 논바닥에 떨어진 이삭하나도 버리지 않고 주었다. 망태기에 가득 담겨진 이삭을 보며 온 식구의 웃음소리에 놀란 달빛은 우리 동네 끝집 단골네 집을 건너 우리집 싸리문에 데려다주고 홀연히 사라졌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늦가을이면 엄마와 함께 가을걷이를 하러 고향땅에 내려갔는데 지금은 집안에 앉아 쌀을 받는 세상이다. 엄마가 저쪽 세상으로 가셨으니 논을 팔아야 하는데 올해만 올해만 하다가 그게 언제가 될지 모르겠다. (사진.글/정영신)
지리산 남쪽 끝자락에 조선시대에 지은 구례 운조루가 있다. 구름 속의 새처럼 숨어 사는 집이라는 뜻으로 호남지방의 대표적인 양반 가옥이다. 운조루에 가면 유럽을 앞서 조선시대에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몸소 실천하고 있는 유씨라는 양반가가 있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유럽 사회고위층 인사에게 요구되는 높은 수준의 도덕적 의무다. 근대와 현대에서도 이러한 도덕적 의식은 계층 간의 대립을 다소나마 해결할 수 있는 최고의 수단으로 여겨져 왔다. 특히 전쟁과 같은 총체적인 국난이 벌어졌을 때 백성들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양반들이 솔선수범하는 모습은 백성을 위하는 도덕적 책임이다. 운조루에는 각종 민란과 여순사건, 6.25전쟁으로 굶어가는 백성을 사랑하는 양반의 두 가지 정신이 지금까지 건재하게 이어오고 있는데 ‘타인능해(他人能解’)와 ‘낮은 굴뚝’이다. 백성들의 굶주림을 줄여주고자 나무 독에 쌀을 채워놓고, 마을의 가난한 사람은 누구나 이 쌀독을 열어, 쌀을 빼 갈 수 있도록 열어두었다는 ‘타인능해(他人能解’)다. 또한 다른 지역 고택들과 다르게 운조루에는 높은 굴뚝이 보이지 않는다. 이는 가난한 백성을 위한 배려로 돌과 흙으로 빚어진 ‘낮은 굴뚝’은 안채중심
오리 몇 마리, 그 옆에 강아지가 지켜보는 가운데 초가지붕을 단장하기 위해 짚을 엮고 있다. 벼 수확을 끝낸 마당에는 짚이 장독대까지 나와 있다. 빛바랜 초가를 내리고, 새로운 초가지붕을 올리기 위한 준비다. 오리가 조근조근 대화하는 소리, 강아지가 오리 대장하는 소리, 사각사각 짚 엮는 소리가 늦가을의 스산함을 대신한다. 브하그완은 ‘사색이란 감각의 하나로 감수성이나 예민함으로 융합하는 것’이라고 했다. 감각을 느끼고 감수성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사물의 사색이다. 사물이 사색에 젖어 있을 때, 사물에서 들리는 소리가 모든 감각을 깨우기 때문이다. 특히 물 흐르는 소리는 생각의 흐름을 따라가는 것 같다. 물끼리 서로 비비는 소리가 들리는 듯, 사각사각 짚 엮는 소리가 점점 다가오는 것 같아 그 소리를 품어 본다. 어릴 적 뛰어 놀았던 골목에서 볏단 속으로 햇빛이 숨어 드는 소리가 들려온다. 시간이 수직으로 서서 내게 걸어온다. (글. 사진/정영신)
[기고] 장터사진가 정영신| 어느날 여름 통도사에서 만난 속이 텅빈 나무의 형상이다. 오래된 나무는 속이 텅텅 비워가면서 죽어간다.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기자신을 조금씩조금씩 비워냈나보다. 600년이란 시간을 고스란히 담아 내게 말을 걸어온다. 시간이 한 방울씩 흘러가는 길위에서 죽어있는 나무의 흔적을 더듬어본다.
[기고] 조문호 작가 | 사진가 황규태선생의 ‘짝사랑 PiXEL ai PixY’ 전이 4월 29일까지 사진 대안공간 ‘space22’에서 열리고 있다. 색의 물결로 이루어진 ‘짝사랑’ 픽셀 작품들을 돌아보며 선생의 끊임없는 매체 실험이나 치열한 작가정신에 존경심이 일었다. 사실 생존한 원로사진가 중 선생만큼 열심히 하는 분이 있던가? 다들 기존 작품으로 회고전이나 여는 처지에 따끈따끈한 신작을 펼쳐 보이며 새로운 시각언어를 토해내고 있으니, 분명 아직도 청춘임이 틀림없다. 더 중요한 것은 작업을 일로 생각하지 않고 선생의 자유로운 생활처럼 놀이로 즐긴다는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어렵게 생각하고 힘들게 작업하는 것보다 더 무모한 짓은 없기 때문이다. 황규태선생의 작가적 역량을 모르는 분이야 없겠지만, 몇 마디 부언할까 한다. 그는 60년대 초반, '경향신문'기자로 시작했으니, 첫 사진은 분명 보도사진인 셈이다. 그러나 신문사특파원으로 미국에 건너가며 실험에 의한 초현실주의 사진으로 바뀌었다. 자신의 머리를 관통하는 총알을 형상화 하는 등 사진의 경계를 넘나드는 자신만의 독창적인 사진 세계를 확립한 것이다. 그때부터 필름을 태우거나 합성하거나, 이중 노출을 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