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렸을 적에는 가족이나 친구들끼리 모여 다 함께 놀았다. 우리가 갖고 놀았던 것들 또한 순수한 자연물이었다. 지금아이들은 학원 아니면 기계와 논다. 사진에서처럼 작은 돌을 모아 공기놀이하는 아이들이 없다. 아이들은 놀이를 하면서 사회성도 배우고, 정서도 배우고, 창의성을 배운다. 창의성개발을 위해 아이들을 공부와 책에 붙들어놓지만 아이들은 놀이를 통하여 자기의 환경을 탐색하고, 세계를 이해하고, 문화를 배우면서 세상살이를 알아간다. 지금 문명은 시간이 만들어낸 것일까. 아이들은 너른 마당을, 드넓은 들판을 모른 채, 방안에서 사람이 만든 기계와 말하고, 보고, 기계에 맞춰 세상을 배운다. (글.사진/장터사진가 정영신)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 유영국(1916~2002) 작고 20주년을 기념하는 'Colors of Yoo Youngkuk'이 삼청로 ‘국제갤러리’ 전관에서 열리고 있다. 산과 자연을 모티브로 강렬한 원색과 기하학적 구도의 유영국 작품들은 조형 미학의 정수를 보여주는 추상화다. “산에는 뭐든지 있다. 봉우리의 삼각형, 능선의 곡선, 원근의 단면, 다채로운 색...” 작가의 말처럼 유영국 추상화의 근간은 산에 있다. 경북 울진에서 태어나고 자란 작가는 아마 주변에 둘러 쌓인 산에서 영향받은 것 같다. 점, 선, 면, 형, 색 등 기본 조형 요소를 산에서 차용하여, 자연적 심상을 화폭에 담아왔다. 이 작품은 강렬한 태양이 화면 전체를 집어삼킬 듯 아른거린다. 농도를 달리한 붉은 색이 면과 면으로 이어진 가운데, 푸른빛 삼각뿔이 중심을 잡는다. 석양 풍경을 추상으로 변환시키며 본질에 다가간다. 그의 그림들은 강렬한 색을 바라보다 잠시 눈을 감으면 일어나는 색채의 잔상처럼 느껴진다. 유영국만의 창발적 색채가 불러일으키는 긴장감이 압권이다. 보색의 조화와 색채의 깊이감을 동시에 부여하며 색을 통한 추상 미학의 절정에 다다르게 한다. 그리고 유영국 작품 제목은 모두 일(Wo
매달 음력 보름날이면 달이 마치 서 있는 것 같은 월출산은 금강산과 설악산에 비할 만큼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면서 남도의 작은 금강산, 남도의 설악산으로 불린다. 월출산은 신라시대에는 월나산(月奈山), 고려시대에는 월생산(月生山), 그 후 조선시대를 거쳐 월출산(月出山)으로 불리게 되어 올림픽이 있던 해인 1988년에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돌 끝이 뾰족뾰족하여 날아 움직이는 듯하다’는 월출산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돌 봉우리들이 높고 또 낮게, 굵다랗고 또 가느다랗게 뾰족뾰족 둘러서 있어 작은 금강산이라고 불릴 만큼 아름다운 산이다. 고려 명종때의 한 시인은 ‘푸른 낭떠러지와 자색의 골짜기에는 말 떨기가 솟고, 첩첩한 산봉우리는 하늘을 뚫어 웅장하고 기이함을 자랑 하누나’고 예찬했다. 또한 구정봉 아래에는 움직이는 돌에 대한 여러 가지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영암이라는 지명이 월출산 돌 때문에 생겼다고 ‘동국여지승람’에 적혀있다. “월출산에는 세 개의 움직이는 큰 바위가 있었다. 이 움직이는 세 돌 때문에 영암에 큰 인물이 난다고 전해져, 이를 시기한 중국 사람들이 움직이는 바위 세 개를 전부 떨어뜨렸다. 그런데 그중 움직이는 돌 하나가 스스로 옛 자기
생각나는 대로 만들고 그리며, 작품이란 틀 자체를 깨부수는 김을의 ‘김을파손죄’전이 서울 조계사 옆 ‘OCI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다. 김을은 기존의 타성을 깨기 위해 늘 새롭게 생각하며 다양한 작업을 시도하는 작가다. 전시장 1층에 설치된 작업실에는 수많은 망치가 벽에 걸려있다. 붓이 있어야 할 곳에 망치가 있다는 것은 자신의 창작이란 망치로 깨부순다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장난감 같은 다양한 오브제를 비롯한 수많은 드로잉 작품이 삼 개 층에 나누어 빽빽이 전시되었는데, 누구처럼 특정한 주제도 없고 일관된 방식도 없다. 닥치는 대로 만들거나 그리고, 아니면 사정없이 파손한다. 작업을 일로 보지 않고, 즐기는 놀이에 가깝다. 전시장 곳곳에 갖가지 인형 형상이나 머리가 어지럽게 늘려 있고, 목마나 수레가 놓여있기도 해, 마치 어린이집이나 놀이터에 온 기분이다. 인형의 신체를 분해하여 다시 조립하고, 그 위에 그림을 그리기도 하는 다양한 행위들이 어린이처럼 자유롭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속에 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다. 심각한 척 그렸으나 능청스러운 익살이 있고, 세상을 향한 야유도 엿보인다. 이러한 것들을 적절히 버무린 균형감이 김을 작업 전반을 아우르는
길은 마을과 마을을 잇고, 사람과 사람을 잇는다. 시간이 품은 이야기를 통해 지난 시간과 다가올 시간을 잇기도 한다. 사람들 또한 길을 통해 이동하면서 다른 많은 것들을 연결하면서 이어 나간다. 원래 길은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저절로 생겨나 짐승이나 사람이 하나둘 지나다니기 시작하면서 만들어진다. 난 ‘길’이란 이름을 입안에 올리면 아름다운 지구인 ‘존 프란시스’를 생각한다. 그는 22년간 길을 걸었고, 17년간은 침묵여행으로 환경을 지켜내는 변화를 시도해 ‘플래닛 워커’라는 책을 썼다. ‘플래닛 워커’는 1971년 샌프란시스코 만에서 일어난 기름유출사고를 보고 ‘편안을 누리며 사는 삶’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자동차대신, 걸으면서 길에서 마주친 사물과 사람들에 대해 기록한 책이다. 그는 길을 걸으면서 우리가 잊어버렸던 자연의 리듬을 발견하고, 말 한마디 없이 이해와 공감을 전하는 법을 배웠다고 한다. 이 특별한 순례자의 삶을 들여다보면서 내가 살아가는 이 땅에서 어떤 행동과 실천으로 변화를 느끼고, 지구를 살릴 수 있을까 고민해본다. (글.사진/ 장터사진가 정영신)
일본 도예가 이시야마 토시키와 판화가 노다 테츠야, 그리고 도예가 이영재의 작품이 어울린 세 거장 초대전이 5월 20일부터 27일까지 ‘민예사랑’에서 열리고 있다. ‘민예사랑’ [김포시 월곶면 문수산로434]은 북한의 개풍군을 눈앞에 둔 서해안 최북단의 살림집에 들어앉은 갤러리로 (고) 문영태화백 미망인 장재순씨가 운영하는 곳이다. '민예사랑'의 개방 전시는 꽃 피는 오월 한 차례만 열린다. 그곳은 정원이 아름다운데다 고가구들이 적절히 배치된 공간의 아늑함이 보는 이로 하여금 행복감에 빠져들게 만든다. 정원에는 돌확과 장대석, 동자석 등 몇백 년은 됨직한 갖가지 골동들이 나무들과 어울려 있고, 전시된 작품이나 생활용품 모두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적절하게 배치되어 주변과 조화를 이룬다. 그런 전시 분위기가 작품의 격조를 높이기도 하지만, 그 자리에 놓인 작품 역시 격조가 높아야 차지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초대된 일본 판화가 노다 테츠야는 도쿄예술대학 교수를 역임했고, 도예가 이시야마 토시키는 후나기 켄지에게 사사 받아 염유석탄가마를 축조하는 등 독보적인 도예 작업을 펼쳐 온 작가다. 그리고 이영재는 카셀 미술대학 도예과 연구교수를 역임한 후 현재 독일에서 도
장터에 가면 호주머니 속에 숨어있던 고향이 사람들 틈 속에서 걸어 나온다. 이른 아침부터 보따리행렬은 생활을 진열하기 위해 장터 속으로 들어온다. 농산물을 가지고 장에 나오는 사람들 모습은 비장하다. 좋은 가격에 농산물을 넘기려는 사람들 표정이 활시위처럼 팽팽하기만 하다. 작은 경제가 일어서는 모습이 장터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또한 여인네들의 보따리 속에는 자녀들의 꿈과 희망이 숨어있다. 여인들에게 땅은 보물창고다. 온갖 씨앗에 비밀을 담아 봄이 되면 보물창고에 시간을 심어 넣는다. 바람소리와 풀소리 그리고 물소리마저도 비밀이 되어 땅속에서 만나게 된다. 여름 내내 밭을 매면서 호미끝자락에 비밀을 묻어놓아 가을이 되면 캐내는 것이다. 드넓은 땅에 콩등을 심어 놓고도 어느 밭에서 순이 제일 먼저 돋아나고, 어느 농작물에 마지막으로 해가 스며드는 것까지 알고 있다. 장날이면 자연도 보따리에 숨어 장터까지 따라 나온다. 장터란 이렇게 땅이 있어 장이 서는 광장이다. 장터에 가면 고향의 냄새와 맛, 소리와 감촉까지 느낄수 있다. ‘손주놈 오면 줄라고 넉달동안이나 시렁에 매달아 놓았는디, 손주놈은 안오고, 돈도 아쉽고 해서 장에 갖고 나왔는디 맛좀보시랑게 잉,
이 세상에 어머니란 말보다 더 편하고 정겨운 말은 없을 것이다. 어깨를 토닥이며 불러주던 자장가로 꿈꾸던 행복은 아련한 그리움으로 되살아난다. 말만 들어도 코끝이 찡해지는 엄마를 형상화한 이명복의 ‘어멍’전이 어버이날에 맞춘 지난 5월4일부터 17일까지 열렸다. 몇 달 전 정영신의 ‘어머니의 땅’ 사진전이 열렸던 ‘나무화랑’에서 다시 그 감회에 빠져든 것이다.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사연 없는 이가 어디 있겠냐마는 어머니를 생각하면 잊을 수 없는 가슴 떨리는 일부터 생각난다. 낙동강 전투의 최후 보루인 내 고향은 피비린내 나는 전장의 한복판이었다. 내 나이 세 살 때였으나 겁에 질려 울지도 못했다. 포화가 잠잠할 즈음,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살던 집을 찾아 나섰다. 유엔군이 진을 친 남산 아래 미나리꽝 뚝길로 지나칠 무렵, 피 흘리며 쓰러진 군인이 ‘물, 물, 물”이라 외치며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움켜잡았고, 옆에 선 군인은 그냥 가라며 총부리로 위협했다. 겁에 질린 어머니가 간신히 군인의 손을 뿌리치기는 했으나 뒤에서 총을 쏠까 염려되어 등에 업힌 나를 가슴에 끌어안고 뛰셨는데, 어머니의 온몸은 땀으로 흥건히 젖어 흘렀다. 그때 느꼈던 어머니의 거친 숨결 속의
박옥수의 ‘시간여행’ 사진전이 지난 5월4일부터 9일까지 ‘인사아트프라자’ 2층 전시실에서 열린다. 사진가 박옥수의 초창기 사진으로 1965년부터 80년까지의 시대상을 생생하게 기록했다. 작품으로서의 가치 뿐 아니라, 중요한 근현대 사료로서의 가치도 지녔다. 박옥수는 고교시절부터 사진가로 두각을 드러냈고, 대학 시절에는 고(故) 이형록 선생이 이끄는 '현대사진연구회’에서 활동했다. 1950년대에서 70년대 초반까지의 한국사진사에서 '신선회', '살롱 아루스', '현대사진연구회'로 이어지는 사진 그룹 활동은 리얼리즘 사진에 대한 자각과 새로운 사진 이념이 생성된 중요한 시기였다. 정범태, 이해문, 한영수, 전몽각, 황규태, 박영숙 등 기라성 같은 사진가들이 활동한 '현대사진연구회'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도 고(故) 이경모선생의 추천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그 이후 대학을 졸업한 후, 사진가 문선호 선생 휘하에 들어가며 광고사진가로 변신한 후 현대자동차 홍보실에서 일하기도 했다. 그는 개인전은 하지 않았다. 가끔 단체전에 내놓은 작품도 리얼리즘 사진보다 서정적인 풍경이 주를 이루었다. 초창기 작품을 본 것은 83년 고(故) 문선호씨가 주도한 ‘한국현대사진대표작'
누군가는 고향은 도시인들이 잃어버린 낙원이라고 한다. 내 유년시절의 고향은 순수함의 공간 그 자체였다. 지금 내 고향은 오라는 이도, 가라는 이도, 기다려주는 이도 없지만 내 존재의 모태임을 인식하게 된다. 내가 어렸을 때 가을걷이의 꽃은 쌀농사였다 나락을 베고 난 논에 이삭 하나라도 떨어져있는지 달이 환하게 뜨는 날, 온 식구가 논에 가서 벼이삭을 주웠다. 난 검정고무신을 신고 도레미파솔라시도를 부르며 살포시살포시 밟아가며 달빛에 비치는 논바닥을 훑으면 손안에는 제법 나락이 쥐어져 있었다. 그 당시 농촌은 쌀이 곧 삶이었던 시대였기에 논바닥에 떨어진 이삭하나도 버리지 않고 주었다. 망태기에 가득 담겨진 이삭을 보며 온 식구의 웃음소리에 놀란 달빛은 우리 동네 끝집 단골네 집을 건너 우리집 싸리문에 데려다주고 홀연히 사라졌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늦가을이면 엄마와 함께 가을걷이를 하러 고향땅에 내려갔는데 지금은 집안에 앉아 쌀을 받는 세상이다. 엄마가 저쪽 세상으로 가셨으니 논을 팔아야 하는데 올해만 올해만 하다가 그게 언제가 될지 모르겠다. (사진.글/정영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