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에서 정거장은 그 지방의 뼈대이며 핏줄이다. 또한 사방에서 모여드는 사람들로 인해 서로 어우러진 삶이 꿈틀거리는 곳이다. 장사하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모여들고, 물건의 교류가 저절로 이루어져 작은 장이 되어 흥청거린다. 장날이면 농사지은 것을 이고, 지고 나온 보따리가 먼저 정거장에 도착한다. 장(場)으로 가려던 사람들은 정거장에서 만난 중간상인과 몇 마디 말을 주고받다가 사고파는 일이 이루어져 굳이 장(場)에 가지 않아도 흥정이 끝나 버린다. 정거장은 어떤 이에게 그리움 일수도 있으며,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릴 수 있는 곳이다. 한낮의 먼지바람을 일으키며 달려드는 버스를 향해 걸어가는 해창아짐의 발걸음이 노랑 병아리처럼 경쾌하다. (사진.글/장터사진가 정영신)
몇년전까지만 해도 산간지방에 눈이 많이 내렸다, 1987년 폭설로 정선장이 열리지 않아 무작정 버스를 타고 시골마을에 들어갔었다.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상태에서 마을 안까지 들어가 눈을 치우는 어머니들을 만난 것이다. 박씨할매는 밤새 소리없이 사박사박 눈 내리는 소리에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며 문을 열고 강아지를 불렀다. 주루루 달려가는 강아지와 박씨할매의 대화를 듣는데 갑자기, 내 어릴 적 고향이 수직으로 걸어와 멈췄다. 우리집 복실이는 강아지답지 않게 식구들 얼굴하며, 목소리까지 기억해 한 가족처럼 지냈다. 눈 오는 날이면 복실이와 함께 뒷동산에 올라가 썰매 길을 만들며 온종일 뛰어 놀았던 그때 그 시절로 시간여행을 떠난다. (사진.글/장터사진가 정영신)
김문호의 ‘豊裏眞景(풍리진경)’ 사진전이 지난 15일 전북도립미술관 서울관“(인사아트6층)에서 개막되었으며, 전시와 함께 ‘풍리진경’ 사진집(눈빛출판사)도 나왔다. 사진집 제목으로 내 세운 ‘豊裏眞景’이란 뭘까? 사진집에 작가 노트는 물론 촬영장소나 일시 등 아무런 정보가 없다, 좋아하는 말로 꼴리는 대로 보라는 것이다. 나름의 독해력을 요구하는 불친절함은 있지만, 고주알 메주알 변명 같은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보다 백배 낮다. 풍리진경이란 풍요로움 속의 이면 정도로 생각할 수 있으나, 풍요로운 현대 문명을 누리는 감춰진 그 속에 진짜 경치가 있다는 것이다. 죽음으로 다가가는 미래의 디스토피아에 관한 이야기다. 작가가 채집한 잿빛 살풍경은 생각의 늪으로 끌어들이는 묘미가 있다. 시멘트로 뒤덮인 아파트나 산업현장의 침울한 이미지가 마치 멸망의 묵시록으로 다가온다. 아파트 건물 사이로 내려앉는 태양은 종말을 예고하는 장엄한 서사같았다 편한 것만 좋아하는 인간의 욕망이 불러낸 눈앞의 현실이다. 그동안 작가는 무분별한 생산과 소비로 황폐화하는 환경을 추적하며 인간들의 각성을 요구했다. ‘밥 팔아 똥 사 먹는 짓’ 한다는 손가락질에도 일편단심 민들레였다. 그런데, 이번
내가 어렸을 적에는 가족이나 친구들끼리 모여 다 함께 놀았다. 우리가 갖고 놀았던 것들 또한 순수한 자연물이었다. 지금아이들은 학원 아니면 기계와 논다. 사진에서처럼 작은 돌을 모아 공기놀이하는 아이들이 없다. 아이들은 놀이를 하면서 사회성도 배우고, 정서도 배우고, 창의성을 배운다. 창의성개발을 위해 아이들을 공부와 책에 붙들어놓지만 아이들은 놀이를 통하여 자기의 환경을 탐색하고, 세계를 이해하고, 문화를 배우면서 세상살이를 알아간다. 지금 문명은 시간이 만들어낸 것일까. 아이들은 너른 마당을, 드넓은 들판을 모른 채, 방안에서 사람이 만든 기계와 말하고, 보고, 기계에 맞춰 세상을 배운다. (글.사진/장터사진가 정영신)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 유영국(1916~2002) 작고 20주년을 기념하는 'Colors of Yoo Youngkuk'이 삼청로 ‘국제갤러리’ 전관에서 열리고 있다. 산과 자연을 모티브로 강렬한 원색과 기하학적 구도의 유영국 작품들은 조형 미학의 정수를 보여주는 추상화다. “산에는 뭐든지 있다. 봉우리의 삼각형, 능선의 곡선, 원근의 단면, 다채로운 색...” 작가의 말처럼 유영국 추상화의 근간은 산에 있다. 경북 울진에서 태어나고 자란 작가는 아마 주변에 둘러 쌓인 산에서 영향받은 것 같다. 점, 선, 면, 형, 색 등 기본 조형 요소를 산에서 차용하여, 자연적 심상을 화폭에 담아왔다. 이 작품은 강렬한 태양이 화면 전체를 집어삼킬 듯 아른거린다. 농도를 달리한 붉은 색이 면과 면으로 이어진 가운데, 푸른빛 삼각뿔이 중심을 잡는다. 석양 풍경을 추상으로 변환시키며 본질에 다가간다. 그의 그림들은 강렬한 색을 바라보다 잠시 눈을 감으면 일어나는 색채의 잔상처럼 느껴진다. 유영국만의 창발적 색채가 불러일으키는 긴장감이 압권이다. 보색의 조화와 색채의 깊이감을 동시에 부여하며 색을 통한 추상 미학의 절정에 다다르게 한다. 그리고 유영국 작품 제목은 모두 일(Wo
매달 음력 보름날이면 달이 마치 서 있는 것 같은 월출산은 금강산과 설악산에 비할 만큼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면서 남도의 작은 금강산, 남도의 설악산으로 불린다. 월출산은 신라시대에는 월나산(月奈山), 고려시대에는 월생산(月生山), 그 후 조선시대를 거쳐 월출산(月出山)으로 불리게 되어 올림픽이 있던 해인 1988년에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돌 끝이 뾰족뾰족하여 날아 움직이는 듯하다’는 월출산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돌 봉우리들이 높고 또 낮게, 굵다랗고 또 가느다랗게 뾰족뾰족 둘러서 있어 작은 금강산이라고 불릴 만큼 아름다운 산이다. 고려 명종때의 한 시인은 ‘푸른 낭떠러지와 자색의 골짜기에는 말 떨기가 솟고, 첩첩한 산봉우리는 하늘을 뚫어 웅장하고 기이함을 자랑 하누나’고 예찬했다. 또한 구정봉 아래에는 움직이는 돌에 대한 여러 가지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영암이라는 지명이 월출산 돌 때문에 생겼다고 ‘동국여지승람’에 적혀있다. “월출산에는 세 개의 움직이는 큰 바위가 있었다. 이 움직이는 세 돌 때문에 영암에 큰 인물이 난다고 전해져, 이를 시기한 중국 사람들이 움직이는 바위 세 개를 전부 떨어뜨렸다. 그런데 그중 움직이는 돌 하나가 스스로 옛 자기
생각나는 대로 만들고 그리며, 작품이란 틀 자체를 깨부수는 김을의 ‘김을파손죄’전이 서울 조계사 옆 ‘OCI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다. 김을은 기존의 타성을 깨기 위해 늘 새롭게 생각하며 다양한 작업을 시도하는 작가다. 전시장 1층에 설치된 작업실에는 수많은 망치가 벽에 걸려있다. 붓이 있어야 할 곳에 망치가 있다는 것은 자신의 창작이란 망치로 깨부순다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장난감 같은 다양한 오브제를 비롯한 수많은 드로잉 작품이 삼 개 층에 나누어 빽빽이 전시되었는데, 누구처럼 특정한 주제도 없고 일관된 방식도 없다. 닥치는 대로 만들거나 그리고, 아니면 사정없이 파손한다. 작업을 일로 보지 않고, 즐기는 놀이에 가깝다. 전시장 곳곳에 갖가지 인형 형상이나 머리가 어지럽게 늘려 있고, 목마나 수레가 놓여있기도 해, 마치 어린이집이나 놀이터에 온 기분이다. 인형의 신체를 분해하여 다시 조립하고, 그 위에 그림을 그리기도 하는 다양한 행위들이 어린이처럼 자유롭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속에 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다. 심각한 척 그렸으나 능청스러운 익살이 있고, 세상을 향한 야유도 엿보인다. 이러한 것들을 적절히 버무린 균형감이 김을 작업 전반을 아우르는
길은 마을과 마을을 잇고, 사람과 사람을 잇는다. 시간이 품은 이야기를 통해 지난 시간과 다가올 시간을 잇기도 한다. 사람들 또한 길을 통해 이동하면서 다른 많은 것들을 연결하면서 이어 나간다. 원래 길은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저절로 생겨나 짐승이나 사람이 하나둘 지나다니기 시작하면서 만들어진다. 난 ‘길’이란 이름을 입안에 올리면 아름다운 지구인 ‘존 프란시스’를 생각한다. 그는 22년간 길을 걸었고, 17년간은 침묵여행으로 환경을 지켜내는 변화를 시도해 ‘플래닛 워커’라는 책을 썼다. ‘플래닛 워커’는 1971년 샌프란시스코 만에서 일어난 기름유출사고를 보고 ‘편안을 누리며 사는 삶’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자동차대신, 걸으면서 길에서 마주친 사물과 사람들에 대해 기록한 책이다. 그는 길을 걸으면서 우리가 잊어버렸던 자연의 리듬을 발견하고, 말 한마디 없이 이해와 공감을 전하는 법을 배웠다고 한다. 이 특별한 순례자의 삶을 들여다보면서 내가 살아가는 이 땅에서 어떤 행동과 실천으로 변화를 느끼고, 지구를 살릴 수 있을까 고민해본다. (글.사진/ 장터사진가 정영신)
일본 도예가 이시야마 토시키와 판화가 노다 테츠야, 그리고 도예가 이영재의 작품이 어울린 세 거장 초대전이 5월 20일부터 27일까지 ‘민예사랑’에서 열리고 있다. ‘민예사랑’ [김포시 월곶면 문수산로434]은 북한의 개풍군을 눈앞에 둔 서해안 최북단의 살림집에 들어앉은 갤러리로 (고) 문영태화백 미망인 장재순씨가 운영하는 곳이다. '민예사랑'의 개방 전시는 꽃 피는 오월 한 차례만 열린다. 그곳은 정원이 아름다운데다 고가구들이 적절히 배치된 공간의 아늑함이 보는 이로 하여금 행복감에 빠져들게 만든다. 정원에는 돌확과 장대석, 동자석 등 몇백 년은 됨직한 갖가지 골동들이 나무들과 어울려 있고, 전시된 작품이나 생활용품 모두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적절하게 배치되어 주변과 조화를 이룬다. 그런 전시 분위기가 작품의 격조를 높이기도 하지만, 그 자리에 놓인 작품 역시 격조가 높아야 차지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초대된 일본 판화가 노다 테츠야는 도쿄예술대학 교수를 역임했고, 도예가 이시야마 토시키는 후나기 켄지에게 사사 받아 염유석탄가마를 축조하는 등 독보적인 도예 작업을 펼쳐 온 작가다. 그리고 이영재는 카셀 미술대학 도예과 연구교수를 역임한 후 현재 독일에서 도
장터에 가면 호주머니 속에 숨어있던 고향이 사람들 틈 속에서 걸어 나온다. 이른 아침부터 보따리행렬은 생활을 진열하기 위해 장터 속으로 들어온다. 농산물을 가지고 장에 나오는 사람들 모습은 비장하다. 좋은 가격에 농산물을 넘기려는 사람들 표정이 활시위처럼 팽팽하기만 하다. 작은 경제가 일어서는 모습이 장터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또한 여인네들의 보따리 속에는 자녀들의 꿈과 희망이 숨어있다. 여인들에게 땅은 보물창고다. 온갖 씨앗에 비밀을 담아 봄이 되면 보물창고에 시간을 심어 넣는다. 바람소리와 풀소리 그리고 물소리마저도 비밀이 되어 땅속에서 만나게 된다. 여름 내내 밭을 매면서 호미끝자락에 비밀을 묻어놓아 가을이 되면 캐내는 것이다. 드넓은 땅에 콩등을 심어 놓고도 어느 밭에서 순이 제일 먼저 돋아나고, 어느 농작물에 마지막으로 해가 스며드는 것까지 알고 있다. 장날이면 자연도 보따리에 숨어 장터까지 따라 나온다. 장터란 이렇게 땅이 있어 장이 서는 광장이다. 장터에 가면 고향의 냄새와 맛, 소리와 감촉까지 느낄수 있다. ‘손주놈 오면 줄라고 넉달동안이나 시렁에 매달아 놓았는디, 손주놈은 안오고, 돈도 아쉽고 해서 장에 갖고 나왔는디 맛좀보시랑게 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