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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뽑히고 잇몸으로 싸운 이도영, <고색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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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잃었어도 문화는 지금도 찬란하다

미술평론가 최석태 |

 

벨기에 태생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1898-1967)의 그림 <이것은 담뱃대가 아니다>는, 널리 알려진 1929년 작품이다. (그림 이름이 담뱃대가 아니라 파이프라고 여기는 분들을 위한 설명은 따로 미룬다). 우리 그림 가운데에는 그에 견주어, '이것은 정물이 아니다!' 라고 하고 싶은 그림이 있다.

 

이것은 정물이 아니다! 이것은 고색찬연이다

 

단색으로 된 도판으로 볼 수밖에 없어서 아쉽지만, 아래 그림에는 귀걸이 같이 장식을 단 토기를 비롯한 이런저런 질그릇들과 종이 그려져 있다. 이 그림은 1922년에 처음 열린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되었다.

 

거죽만 호화판으로 만들고, 정작 그림은 단색으로 재현된 조선미술전람회 도록에 실린 것이다. 도록에는 이 그림을 <정물>이라고 하였다. 그리 크지 않은 도판이라 그림 속에 적은 작은 글씨는 판독이 어려우나 그 옆의 제목으로 쓴 큰 글씨는 읽기가 가능하다. 그래서 읽는다! 고색찬연!

 

고古; 오래다 색色; 빛, 빛깔 찬燦; 빛나다, 번쩍하다 연然; 그럴, 그렇다

 

그림 이름이 어디까지나 고색찬연이다. 그런데 고색찬연으로 입력해도 고색창연으로 나온다. 고색과 찬연을 따로 입력해도 찬의 한자가 다르다. 고색창연이나 고색찬연이나 비슷하다면 비슷한 뜻이기는 하지만, 그린이가 굳이 그리 적은 까닭이 분명 있을 것이다.

 

 

제목은 그렇다치고 그림에 그려진 소재들에 눈길을 돌려보자. 꽃이나 과일을 그리는 것이야 따로 입에 올릴 필요도 없는 일이지만, 그 꽃이나 과일을 담고있는 그릇들은 무엇인가?

 

화면 맨 위부터 장미로 보이는 꽃을 담고 있는 키가 좀 큰 꽃병은 고려 시기 청자로 보인다. 그 앞에는 종이 놓여 있다, 좀 떨어진 곳에 영지버섯을 담고 흔들리는 장식을 단 그릇, 그 옆으로 굽이 높은 잔과 손잡이가 달린 그릇이 놓여있다. 화면 아래의 작은 그릇 두어가지는 여백을 메우는 보조 역할이라고 보인다.

 

이 그릇들, 종 같은 물건들은 지금은 박물관에서나 혹은 그런 유물 사진을 모은 책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물건들이다. 하지만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에는 달랐다.

 

일본 식민주의자들은 완전 병탄 훨씬 전인 1902년부터 경주 불국사를 비롯한 경주의 문화재로부터 전국 각지에 무엇이 있는지 살피는 것으로 우리의 문화재 조사를 시작했다. 책임자는 세키노 타다시라는 고건축 연구자로 뒷날 우리 미술사를 최초로 써낸 저자의 한 사람이다. 

 

최초의 박물관이 등장한 것도 1909년이다. 이도영이 최초의 동물원, 식물원이 만들어진 것을 만평으로 환영한 일도 있다. 이 때 만들어진 박물관은 '제실박물관'이라 이름 지어져 대한제국의 박물관으로 시작했다가 이듬해 국권의 완전 상실로 '이왕가박물관'이라는 이름으로 격하되었다.

 

콜롬부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다는 어처구니 없는 표현처럼, 석굴암 발견이라는 사건 아닌 사건이 벌어진 것도 1911년, 이런 활동의 와중에 일어난 일이다. 한편 1904년에는 처음으로 무덤 등을 파내는 고고학적 발굴이 행해졌다. 지금 우리가 보는 수많은 토기를 비롯하여 여러 박물관에서 볼 수있는 유물들이 이 때부터 발굴이라는 이름으로 발견되기 시작한 것이다.

 

앞에 잠깐 나온 고건축 연구자 세키노는 1915년부터 무려 20년에 걸쳐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전부 15권에 이르는 '조선고적도보'의 발간 책임자다. 이 대사업이 마감된 후에 그는 프랑스의 학사원이 수여하는 문화훈장을 받았으며 그 직전인 1932년에 우리 미술사를 저술, 발간한 바 있다. 언어는 일본어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독일사람 안드레 에카르트가 몇 년 먼저 독일어로 써냈고 동시에 영어로도 옮겨냈지만, 영향력은 세키노의 책이 더 컸을 것은 불을 보듯 뻔하지 않았을까?

 

문화재라 말하는 이런 소재를 이도영이 그림에 그린 까닭은 무엇일끼? 이도영이 <고색찬연>에 그려 넣은 토기와 청자 등은 바로 이렇게 발굴이라는 과정을 거친 것이다. 당시 고종에게 고려 시기의 청자를 보여주자 처음 본다는 반응이었다고 하는 일화도 있을 정도로, 당시에 막 시작된 발굴을 통해 비로소 우리 눈앞에 문화재가 드러난 것이다.

 

이도영은 이 문화재들을 직접 박물관에서 보았거나, 조선고적도보 같은 화보집에서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를 그림으로 옮겼다. 이도영 이전에는 아무도 그러지 않았다.

 

이도영이 이 그림을 그리기 직전인 1921년 9월에는 엄청난 부장 유물들로 놀라움을 안겨준 발굴이 있었다. 그것이 바로 금관총으로 이름 지어진 신라 무덤으로 당시 동아시아 고고학에서 보기 드문, 역사에 기록할 발굴이라 평가된다. 이도영의 그림은 이 같은 분위기 속에서 우리 문화가 얼마나 찬란한 것인지 알리고자 그려졌다.

 

나라를 빼앗겨 자기 나라 역사와 문자마저 배우고 익히지 못하게 된 상황에서 이런 행동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도영은 식민주의자들이 으스대면서 제시한 과시물에서 우리의 남다른 면모를 알게 하는 발굴품 사진에서 쓸모있는 것을 따로 모아서 일종의 ‘되받아 묘사하기’를 한 것이다.

 

고려시기 청자는 상감이라는 방법으로 세계도자사에서 처음으로 또렷한 무늬 그리기를 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게다가 비색이라는 색은 물론 모양에서도 손꼽는 것이다. 종은 한국종 혹은 조선종이라는 학명으로 꽤 오래전부터 별도로 취급하고 있다. 이도영의 이런 노력이 바로 식민 지배하에서, 식민문화를 벗어나기 위한 노력이 아닌가! 그러나 이런 노력에 대한 평가는 싸늘하고도 혼돈스러운 것이었다.

 

 

 

이도영의 이런 작업은 직접 토기나 청자를 보고 그린 것일까, 아니면 조선고적도보의 인쇄된 사진 도판을 보고 그린 것일까?

 

무어라고 단언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도판과 거의 같은 상태인 것도 보이는 것으로 보아 도판에 의존한 것이라 추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초상사진을 참고하여 초상화를 그린 채용신의 작업에 이어 사진을 참고하여 그린 첫 정물화 사례로 기억하면서 그 의미를 되새겨야 할 것이다.

 

거듭 말하거니와 이 그림의 제목은 정물이 아니다. 제목은 그림에 적혀 있는대로, <고색찬연>이다. 이런 그림의 이름을 일본 강점시대 지배자의 핵심인 총독부가 발행한 도록에는 정물이라고 다르게 썼다. 그리고 그것이 제대로 된 이름인 듯 지금까지도 끈질기게 사용되고 있다.

 

같은 전람회에 출품된 그림이 역사인물화 <석굴수서>다. 이도영이 그 전해에 잡지에 선보인 <이것이 웬 세상이야>와 겹쳐서 이 두 그림을 보면, 이도영이 의도한 바가 무엇인지 알 수 있지 않을까? 그는 일본 강점의 부당함과 이런 질곡을 벗어나기 위해 해야할 미술 과업에 대하여 고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