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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보편성 증명한 오자와 세이지를 추모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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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지의료재단 이사장 이왕준|

 

일본이 낳은 세계적인 지휘자이자 20세기를 대표할 위대한 아시아 음악가 중 한 사람인 오자와 세이지(일본어로는 小澤 征爾)가 어제 별세했다. 전 세계적으로 SNS를 통해 그를 추모하는 글들이 계속 올라오고 있다. 


동양인으로서는 최초로 클래식과 오페라 영역에서 세계적인 반열에 올라 그 존재감을 각인시키고 예술의 보편성을 증명한 이 위대한 음악가의 영면을 함께 기도한다. 

 

 

그는 20세기 후반에 동양인(더 좁게는 아시아인)이 서양 음악의 본류에서 그들과 동등하게 음악 활동이 가능함을 증명한 최초의 음악가였으며 지휘자로서 열정적이고 독보적인 자신의 음악영역을 구사한 거장이었다. 아시아 음악인들이 서양 무대에 이후 대거 진출하는데에도 직간접적인 영향을 끼쳤으니 한국의 음악가들도 그에게 많은 덕을 본 셈이다. 

 

아침부터 그가 2011년 76세 때 식도암 수술을 받고 휴양을 할 때 무라카미 하루키와 나눈 대담집을 읽고 있다. 9년 만에 다시 꺼내어 읽고 있다. 오자와 세이지 옹의 음악적 신실함과 사회적 헌신성이 절절히 느껴진다. (그가 노후에 일본 안에서건 유럽에서건 벌인 모든 아카데미 활동은 무료자원봉사였다. 또한 사이토 키넨 오케스트라는 어떠한가?)

 

 

음악은 1995년에 연주한 말러 2번을 같이 듣고 있다. 이 유튜브 영상은 그래도 아주 좋은 화질과 음향으로 남아 있는데 1945년의 원폭투하 50주년을 추념해서 그 희생자들을 기리는 평화음악회이다. 나가사키의 우라카미 성당에서 95년 6/13-14에 열린 음악회인데 뉴 재팬 필에 시카고 심포니와 보스톤 심포니의 수석 주자들이 같이 했다. 캐슬린 배틀이 소프라노로 노래한다. 4악장의 선율이 세이지 옹의 영원한 안식과 예술혼의 부활을 노래하는 듯하다. 
 
오자와 세이지는 지금은 중국 선양인 만주 봉천에서 1935년에 태어났다. 금년이 향년 89세이다. 일곱살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는데  음악명문인 도호학교에 진학하여 사이토 히데오에게 사사하면서 본격적으로 지휘를 공부했다. (1984년 세계 최초 비상임 프로젝트 오케스트라 <사이토 기념 교향악단>이 출범하게 된 배경이다. 이후 말러 챔버 오케스트라나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 도이치 캄머 오케스트라 등의 유수한 악단이 이런 형식으로 뒤를 이어 생겨났다)

 

대학 졸업 후 1959년 프랑스로 건너가 브장송 국제청년지휘자 콩쿨 1위를 시작으로 커리어를 시작했는데, 베를린필에서 카라얀에게 사사했고 1961년에는 레너드 번스타인의 뉴욕필의 부지휘자가 되었다. 1973년부터 당대 최고의 명성을 뽑내던 (당시는 보스톤 심포니가 거의 뉴욕필과 쌍벽이었다.) 보스턴 심포니의 음악감독에 방년 38살에 취임해서 30년을 지휘했다. 

 


이 기록은 지금의 관점에서도 획기적이고 대단한 일이다. 당시 일본인들의 자부심은 물론이고 모든 아시아인들의 긍지가 올라가는 사건이었다. 보스톤 시민들이 얼마나 지휘자 오자와 세이지를 사랑했는지는 그의 은퇴 기념 음악회 실황을 보면 너무 생생하다. 

 

이후 2002년부터 약 10년간 빈 국립오페라극장의 음악감독으로 활동했는데 2010년 빈 필의 명예단원 칭호를 받았다.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이 자리는 바로 구스타프 말러,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부르노 발터, 칼 뵘,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클라우디오 아바도의 뒤를 잇는 것이다. 그는 지휘자로서 지난 150년의 서양음악사에서 가장 높은 거봉의 하나였다. 

 

일본에 그의 리더십으로 창단된 사이토 키넨 오케스트라는 지금도 세계 최고 악단의 반열에 있다. 그리고 매년 여름이면 마츠모트에서 <오자와 세이지 페스티벌>이 열리고 있다. 일본을 대표하는 최고의 음악축제이다. 

 

그의 선한 영향력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이다. 

 

그의 음악 여정과 헌신을 다시 한번 추모하며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추천 영상은 뭐니뭐니해도 1989년 베를린필과 함께 한 <카르미나 부라나>이다. 일본 신유 카이 합창단을 초청해서 같이 연주했는데 30여년 전에 이 영상을 보고 너무 부러워했던 기억이 소환된다. 지금 봐도 최고의 명연이다. 캐서린 배틀이 정말 전성기 시절이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