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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첫 역사화, 이도영 <석굴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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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평론가 최석태 |

 

수염이 풍부한 노인이 보이고 그 앞에 한 젊은이가 꿇어앉아 한 권의 책을 받들고 있다. 배경은 나무가 둘러있는 석굴인 듯 하다. 그림의 오른쪽 위에 큰 한자 글씨가 세로로 “석굴수서”라고 적혀있다. 석굴을 배경으로, 한 노인이 젊은 남자에게 책을 주고 받는 광경을 그렸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 곁에 작은 글씨로 적힌 것은 그림의 내용인데, 김유신의 젊은 시절 이야기이다. 이런 저런 책들을 참고하여 살펴보니 삼국사기에서 따다 적으면서 약간의 변개를 거쳤음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 열전 '김유신전' 부분에서 해당하는 내용을 보자.

 

 

 

진평왕 28년에 김유신의 나이 17살이 된 때이다. 옆 나라들이 침범하는 것을 보고, 의분이 북받쳐 적도들을 평정할 뜻을 품고 홀로 중악의 석굴로 들어가 재계하고 하늘에 고해 맹세하였다. “적국들이 도의가 없어 승냥이와 호랑이가 되어 우리 강토를 어지럽히니 평안할 날이 없었습니다. 저는 일개 미천한 신하로 재주와 힘은 보잘것없으나 나라의 환란을 없애고자 하는 뜻을 가지고 있사오니, 바라옵건대 하늘은 굽어 살피사 저를 도와주소서.”

 

나흘 후 홀연히 거친 베옷을 입은 노인 한 분이 나타나서 물었다. “이곳은 독벌레와 맹수가 들끓어 두려운 곳인데, 귀한 소년이 이 외진 곳에 무슨 까닭으로 왔느냐?” “어르신께서는 어디서 오셨습니까? 존함을 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나는 정한 곳 없이 인연에 따라 오고 가며, 이름은 난승이라고 한다.” 유신은 그 말을 듣고 범상치 않은 사람인 줄을 알고, 다시 절하고 나아가 아뢰었다. “저는 신라사람입니다. 나라의 원수를 보니 마음이 아프고 머리가 근심으로 가득차서, 이곳에 와 무슨 계제를 만날 것을 바랄 뿐이었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어르신께서는 저의 정성을 가엾게 여기시어 방술을 일러주소서.”

 

노인은 잠자코 말이 없었다. 유신은 눈물을 흘리며 부지런히 간청하기를 예닐곱 번이나 하였다. 그제야 노인은 말문을 열었다. “그대는 아직 어린데도 삼국을 아우를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 어찌 장하다 하지 않으랴.” 이윽고 비법을 주면서 다시 말하였다. “삼가 함부로 전하지 말라. 만약 의롭지 못한 데에 쓴다면 도리어 그 재앙을 받을 것이다.” 노인은 말을 마치자마자 곧 떠나 2리쯤 멀어지니, 유신이 쫓아가 둘러보았으나 보이지 않고 오직 산 위에 오색빛만 찬연하였다.

 

               - 김부식 외, 삼국사기, 열전, 김유신 앞머리에서, 이강래 옮김, 한길사,751~2쪽

 

이 열전은 조선 시대 말기에 내용이 더해져 소설로도 만들어졌다. 이도영이 태어날 무렵이었다.이정균이란 분이 지었고, 그가 사망하는 해인 1899년에 간행하였다. 이 소설은 뒤에 나온 이런저런 김유신 전기소설의 원본이 되었다.

 

이 그림을 그린 이도영은 1884년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여러 곳의 군수를 지냈으며, 할아버지는 오늘날 서울시장에 해당하는 한성판윤을 지냈다. 조선시대 내내 고위 벼슬자리를 차지한 8대 권문세가의 하나인 연안 이씨 문중이다. 이도영은 신식 화폐를 제조하기 위해 설립한 전환국의 분석과에서 공부하고 여러 애국계몽단체에서 활동하다가 만화를 그리기도 한, 당대 미술가들과는 분명 구별되는 남다른 행적을 보였다.

 

이 그림은 우리 근대 본격 역사화의 하나이다. 더욱이 일본 강점기에 우리 역사를 가르치지 못하게 한 분위기에서 그려진 것이라는 점에서 더 큰 의미가 있다. 우리 근대 회화에서는, 이전에 소개한 이여성의 사례(최초 조선역사 회화가 이여성의 <격구>)를 제외하면 역사화라할 만한 것이 없다. 이순신, 논개의 단순한 인물초상화나, 최치원이나 을지문덕 같은 인물에 일본 옷을 입혀 그려서 오히려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하는 어처구니 없는 예만 있을 뿐이다. 이런 사정을 살피면, 일찌기 그려진 이도영의 이 그림은 더욱 돋보이는바가 있다.

 

 

김유신의 젊은 시절 일화를 다루었다는 점 말고도 이 그림이 눈길을 끄는 요소가 또 있다. 김유신 옆에 있는 좁고 높은 탁자 위에 있는 토기와 그 뒤의 질그릇들이다. 이 그림과 거의 동시에 그려진 <고색찬연>이라는 작품에 등장하는 기물들과 같은 성격을 띠는 소재로, 이는 이도영의 남다른 시도라 평가할 수 있다.

 

이 그림에 등장하는 토기는, 제작연도를 확인할 수 있는 것으로는 최초의 토기이다. 이도영의 그림은 그러한 고고학적 발굴 성과를 그림에 반영한 희귀한 사례중의 하나다. 일본 강점이라는 상황이 아니었다면, 이런 노력은 이도영을 넘어서 대세를 이루지 않았을까?

 

이도영은 이후에 김정희가 글씨 쓰는 모습을 그리거나, 장승업이 그림 그리는 장면을 그려서 자신이 살아간 가까운 시기의 우리 문화영웅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서 보는 사람들에게 각인하고자 하였다. 이 또한 당시 어느 누구도 시도한 적이 없는 노력이다.

 

이도영은 젊은 시절에 시사만화와 신소설들의 표지 그림, 그리고 그 속에 든 삽화 분야에서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중년무렵인 1920년대 들어서는, 고고학적으로 발굴된 신라나 가야의 질그릇이나 고려 청자를 비롯한 우리 특유의 종(뒤에 조선종 내지는 한국종이라는 학명을 획득했음)을 그린 첫 화가다. 우리 눈앞에 수천년 전 조상들의 삶의 자취를 드러내며, 이민족 지배하일지라도 민족문화를 지키자고 호소하는 듯한 민족적 역사화의 선구자였다.

 

이 그림은 일본 강점기부터 1970년대 사이에 손꼽는 미술품수집가였던 이동근의 소장품이었다가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됐다. 이를 기려서 낸 소장품 도록에 단색으로 소개되었지만 실제로 전시된 적이 없었다. 필자가 민족미술가로서의 이도영을 처음 소개하였고, 근래에 비로소 전시를 통해 잠시나마 우리 눈 앞에 드러났다.

 

그럼에도 이도영을 친일분자로 분류하는 사람들이 있다. 과연 그러할까?

 

지금은 고인이 된 재일 역사학자 강동진은 <일제의 한국침략정책사>(한길사, 1980)에서 이도영이 총독부의 부름에 20차례 가깝게 오간 기록이 있다고 하였다. 병탄 전야에 벌인 그의 만평 활동(관련기사 <이것이 웬 세상이야>, 이도영의 미술행동), 앞으로 소개할 <고색찬연>을 비롯하여 간헐적으로 계속된 민족적인 그림들 등을 염두에 둔다면 그를 직업적 친일분자로 단언한 것이 과연 균형 잡힌 판단인지를 살피게 한다. 이도영에 관한 이런저런 행적을 살펴서 실체를 파악하기에 동참해 주시기를 바란다

 

참고문헌

강동진, 일제의 한국침략정책사, 한길사, 1980

김부식 외, 삼국사기 2, 이강래 옮김, 한길사, 1998

최석태, 애국계몽운동과 한국 근대미술; 이도영론, 창작과비평 93, 1996. 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