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아트 편집부 | 수원 행궁동의 한 카페에 쌓인 300여 권의 방명록이 무대 위로 올라온다. 싱어송라이터 남수(본명 남수현)가 기획한 차담극 <시인과 농부> 사전공연이 관객들과 만날 예정이다.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적 기록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이 독특한 프로젝트는 현재 문화예술계에서 주목받고 있는 '참여형 예술'의 새로운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행궁동 '딱따구리 책방'을 운영하며 음악 활동을 병행하고 있는 남수는 맞은편에 위치했던 카페 '시인과 농부'에 남겨진 방명록들에서 이번 프로젝트의 영감을 얻었다고 밝혔다. 처음에는 단순한 인테리어 정도로 여겨졌던 이 기록들이 친구들과 함께 읽어보는 과정에서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다는 것이다. 각기 다른 시점에 카페를 찾은 사람들이 남긴 솔직한 감정과 일상의 단편들이 모여 하나의 거대한 서사를 이루고 있음을 발견한 것이다.
남수는 "방명록을 낭독하고 즉흥 연주를 더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며 "그 아이디어가 예빈을 만나며 연극이라는 구체적인 형태로 자리잡았고, 이후 다예와 우근이라는 든든한 동료들과 함께 음악이 함께하는 이머시브 연극으로 확장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단순한 낭독회에서 시작된 아이디어가 음악, 연극, 그리고 관객 참여까지 아우르는 종합예술로 발전해가는 과정 자체가 이 프로젝트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번 사전공연은 본격적인 연극 공연에 앞서 초기 아이디어였던 방명록 낭독과 즉흥연주가 무대 위에서 처음 선보이는 자리다. 완성된 대본이나 정해진 연출 없이 그 순간의 감흥에 따라 진행되는 이 공연은 관객들에게도 새로운 경험을 선사할 것으로 예상된다. 남수는 "처음 방명록을 마주했을 때의 낯선 흥미, 그리고 그 글들이 단순한 낙서를 넘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던 그 감정을 음악과 함께 나누고 싶다"고 공연에 대한 기대를 드러냈다.

함께 참여하는 김동산은 '출장작곡가'라는 독특한 타이틀로 한국 음악계에서 주목받아온 인물이다. 지난 10여 년간 거리와 카페, 때로는 철거 농성장에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즉석에서 노래를 만드는 파격적인 활동을 펼쳐왔다. 2017년 발표한 정규앨범 '서울·수원 이야기'로 제16회 한국대중음악상 포크 부문 후보에 오르며 작업의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기도 했다.
김동산의 음악적 여정은 2010년 수원의 한 공원에서 '천 원에 노래를 만들어드립니다'라는 즉흥적인 아이디어로 시작됐다. 당시 환경운동가로 활동하던 그가 학교 따돌림을 당하는 초등학생의 이야기를 듣고 만든 노래에 함께 온 누나가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며, 음악이 가진 소통과 위로의 힘을 깨달았다고 한다. 이후 그는 젠트리피케이션 피해자들, 부당해고 노동자들, 재개발로 터전을 잃은 상인들의 이야기를 노래로 담아내며 현장성 있는 음악을 선보여왔다.
특히 그의 대표작인 '4인가족'은 가로수길 유명 곱창집의 실제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곡으로, "그저 맘 편히 장사하고 싶어, 제일 좋은 재료 구해서 정성껏 대접하면 4인 가족이 먹고 살 수 있는 그런 단순한 삶을 지키고 싶어"라는 가사로 소상공인들의 절박한 현실을 생생하게 전한다. '노래하는 이유'에서는 13년간 해고 투쟁을 벌인 콜트콜텍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통해 "콜텍은 그 값싼 노동력을 이용해 돈을 벌고, 미국은 그렇게 만든 기타를 가져가 우리에게 다시 판다"며 세계화와 자본주의의 본질을 날카롭게 꿰뚫어본다.

남수는 행궁동에서 '딱따구리 책방'을 운영하며 지역 문화 활동의 거점 역할을 해오고 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수원화성이 감싸안은 행궁동의 골목 한편에 자리한 이 작은 공간은 책방이자 카페, 공연장이자 쉼터 역할을 한다. 독립 서적과 동료 뮤지션들의 앨범, 지역 작가들의 소품들이 어우러진 이곳은 남수의 삶 그 자체를 보여주는 공간이기도 하다.
음악적으로는 초등학교 시절 피아노로 시작해 재즈 피아노와 보컬을 거쳐 포크 음악으로 정착한 탄탄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화려한 기교 대신 삶의 경험에서 길어올린 담백한 가사와 서정적인 멜로디로 자신만의 색깔을 구축해왔다. 대표곡 '와산리'는 한 마을을 주제로 의뢰받아 만든 곡으로 밝고 정겨운 멜로디가 인상적이며, 2024년 발표한 '안녕(먼 곳의 그대에게)'는 전쟁 반대 컴필레이션 앨범에 수록되어 그의 폭넓은 음악적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주목할 점은 남수가 음악 활동과 책방 운영을 지속하기 위해 야쿠르트 배달, 식당 주방 보조, 대리운전, 택배 배송 등 다양한 생계형 일자리를 병행해온다는 사실이다. 그에게 이러한 'N잡'의 삶은 고단하지만, 하고 싶은 일을 계속하기 위한 능동적인 선택이자 과정이다. 오히려 이런 경험들이 음악의 진솔함을 더하는 자양분이 된다고 생각한다는 그의 철학은 많은 예술가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두 아티스트의 만남으로 탄생한 이번 프로젝트는 여러 면에서 의미가 깊다. 우선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적 기록을 예술적 소재로 승화시킨다는 점에서 '일상의 예술화'라는 현대 예술의 중요한 흐름을 보여준다. 카페를 찾은 수많은 사람들이 남긴 솔직한 이야기들이 음악과 연극을 통해 새로운 생명력을 얻는 과정은 예술의 민주화이자 참여형 예술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다.
또한 지역 문화의 기록과 보존이라는 측면에서도 주목할만하다. 행궁동이라는 특정 지역의 문화적 기억을 예술 작품으로 재구성함으로써 지역성과 보편성을 동시에 확보하는 시도로 볼 수 있다. 이는 최근 문화예술계에서 강조되고 있는 '지역 기반 예술'의 좋은 사례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더불어 완성된 작품을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기존의 공연 형태에서 벗어나, 관객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과정 자체를 공연으로 선보인다는 점도 흥미롭다. 사전공연이라는 형식을 통해 관객들은 작품의 완성 과정을 지켜보고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본공연은 이미 예매가 마감된 상태지만, 사전공연을 통해 관객들은 완성된 연극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이 특별한 프로젝트를 경험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글로 남겨져 정적인 상태로 머물러 있던 기록들이 음악과 연극을 통해 어떻게 역동적인 무대 예술로 재탄생할지, 그리고 현장성을 중시하는 두 아티스트의 협업이 만들어낼 화학작용이 기대되는 공연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남기고 간 평범하지만 진실한 이야기들을 무대 위로 가져와 우리 모두의 이야기로 만들고 싶다는 남수의 포부가 어떤 결실을 맺을지 문화예술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