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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은 ‘리스크 회피’, 협동조합은 ‘리스크 감수’… ‘예술인 복지금고’는 사회적 금융에서 답을 찾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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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관이 ‘서류’를 볼 때, 조합은 ‘사람’을 만났다
관료가 아닌 현장이 답이다… ‘예술인 복지금고’ 성공을 위한 민관협력 제언
‘재정 지원’은 국가가, ‘신뢰 기반 운영’은 현장이… 성공적인 복지금고를 위한 역할 분담

뉴스아트 편집부 | 이재명 정부가 야심 차게 내놓은 ‘예술인 복지금고’가 기로에 섰다. 현장에서는 수년간 예술가들에게 ‘위험 떠넘기기’로 비판받아 온 공공의 전철을 밟을지, 아니면 공동체의 신뢰를 바탕으로 과감히 리스크를 감수한 한국스마트협동조합(이하 조합)의 길을 따를지 주목하고 있다. 공급자의 ‘리스크 제로’를 추구하다 발생하는 행정 실패와, 예술인과의 ‘관계금융’을 통해 7억 원의 신뢰 자산을 쌓아 올린 조합의 뚝심. ‘예술인 복지금고’의 성패는 결국 누구의 철학을 선택하느냐에 달려있다.

 

국가의 약속, 그러나 현장은 왜 불안한가

 

이재명 정부가 국정과제로 발표한 ‘예술인 복지금고’ 신설은 예술계에 오랜만에 찾아온 단비 같은 소식이었다. 질병, 재해, 실직 등 예측 불가능한 위기에서 최소한의 존엄을 지켜줄 사회안전망이자, 예술을 ‘노동’으로 인정하겠다는 국가적 선언이었기 때문이다. 연극배우 A씨(42)는 “공연이 없는 달에는 수입이 ‘0원’이라 아프면 대책이 없었다”며 “정말 필요한 순간에 기댈 수 있는 버팀목이 생긴다는 사실만으로도 창작에 더 몰두할 힘이 생긴다”고 기대감을 표했다.

 

하지만 이 장밋빛 청사진 뒤에는 깊은 불신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현장은 묻는다. “그래서, 그 좋은 제도를 과연 누가, 어떤 철학으로, 누구의 리스크 위에서 운영할 것인가?” 이 질문의 근원에는 수년간 예술인들에게 희망고문만을 안겨준 공공 금융의 실패 경험이 자리하고 있다.

 

‘리스크 회피’가 낳은 행정 실패 - 복지재단의 ‘책임 없는 복지’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이하 재단)의 ‘예술인생활안정자금(융자)’ 사업, 특히 전세자금대출은 공공 금융이 어떻게 현장을 외면하고 행정 실패로 귀결되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연 1.95%라는 파격적인 금리에도 불구하고 ‘그림의 떡’이라 비판받는 이유는, 그 설계 기저에 기관의 ‘리스크 회피’ 논리가 깊숙이 박혀있기 때문이다.

 

핵심 독소 조항은 ‘선(先) 계약, 후(後) 심사’ 구조다. 이는 재단의 대출 심사 탈락 리스크를 제로(0)로 만드는, 공급자 입장에서는 완벽한 장치다. 하지만 그 리스크는 고스란히 계약금을 날릴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가장 취약한 예술가에게 전가된다. 이로 인해 경제적으로 취약한 예술가가 대출 승인 이전에 계약금을 걸고 도박을 해야하는 상황이 만들어 진다.

 

18종의 서류를 들고 ‘서울 방문 접수’만 고수하는 아날로그 행정 역시 마찬가지다. 서류 분실이나 위조 등의 행정 리스크를 최소화하려는 재단의 방어적 조치가, 지방 예술인들의 접근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거대한 장벽이 된 것이다.

 

이 사업은 “우리는 절대 손해 보지 않겠다”는 강력한 리스크 회피 동기 아래 움직이고 있다. 예술인의 절박함보다 기관의 안정성이 우선시되는 순간, 복지는 ‘책임 없는 행정’으로 전락하고 만다.

 

‘뚝심 있는 리스크 감수’가 만든 성공 - 한국스마트협동조합의 ‘관계금융’

 

 

재단의 ‘리스크 회피’와 정반대의 지점에서, 기적 같은 성공 사례가 만들어졌다. 조합이 운영하는 ‘예술인 상호부조 대출’이다. 이들의 성공 비결은 단 하나, “우리가 리스크를 안겠다”는 뚝심 있는 철학이었다.

 

조합은 예술인이 처한 구조적 어려움을 이해하고 그들을 믿었기에, 기존 금융권이라면 절대 시도하지 않을 ‘신용 무관 대출’을 시작했다. 이는 조합 스스로가 대위변제(대신 빚을 갚아주는 것)라는 실질적인 금융 리스크를 감수하겠다는 선언이었다.

 

이 대담한 뚝심은 예술인들과의 지속적인 ‘관계 맺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조합은 차가운 서류로 대출 심사를 하는 기관이 아니다. 조합원의 삶을 상담하고, 아티스트 페스티벌 ‘씨앗페’를 통해 함께 기금을 만들며 연대감을 다지는 따뜻한 공동체다. 이 끈끈한 ‘관계금융’이 ‘먹튀’가 아닌 ‘책임감 있는 상환’으로 이어지는 핵심 동력이었다. 서인형 이사장은 “높은 이자 부담 때문에 창작을 포기하는 예술인이 없어야 한다는 절박함에서 시작된 일”이라며 “이번 7억 원 돌파는 예술인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금융 주권을 찾아가고 있다는 증거”라고 강조했다.

 

그 결과는 숫자로 증명됐다. 누적 대출액 7억 원 돌파, 연 5% 저금리, 그리고 대위변제율 5.10%. 이 놀라운 수치는 “리스크를 감수하고 신뢰를 보냈을 때, 공동체는 신뢰로 답한다”는 사회적 금융의 위대한 명제를 현실에서 증명한 것이다.

 

‘예술인 복지금고’, 리스크를 감수할 용기가 있는가?

 

‘리스크’에 대한 태도가 정책의 성패를 가른다. 만약 복지금고가 재단의 ‘리스크 회피’ 모델을 답습한다면, 예술인들은 또다시 증명의 굴레에 갇히고, 위험을 떠안고, 절망할 것이다. 진정한 성공을 원한다면, 국가는 ‘궁극적 리스크 감수자’로서의 역할을 인정하고, 현장의 ‘관계금융’ 전문성을 존중해야 한다. 정부는 복지금고의 재원을 마련하고 초기 부실에 대한 최종 안전판 역할을 맡되, 실제 대출 심사와 운영, 리스크 관리는 예술인과 가장 가까이서 관계를 맺어온 사회적 금융 모델과의 연대를 통해 진정한 복지로 나아가야 한다.

 

진정한 예술인 복지는 ‘리스크 없는 완벽한 시스템’을 만드는 공허한 시도가 아니다. ‘사람을 믿고 기꺼이 리스크를 감수하겠다’는 용기 있는 철학에서 시작된다. ‘예술인 복지금고’가 과연 그 용기를 보여줄 수 있을지, 대한민국 예술계 전체가 숨죽여 지켜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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