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석태 미술평론가 | 홀딱 벗고 그림을 보고 있는 우리들을 등진 남자가 구릿빛 피부를 뽐내며 활을 쏘고 있다. 꺾은 무릎과 발가락 그리고 위로 활을 쥔 오른손이 화면 아래위로 조금은 잘려져 보이도록 그려, 인물이 화면을 그득하도록 채웠다. 그러느라 활은 아예 중요부분만 보이고 끄트머리는 보이지 않는다. 사진이나 영화에서 '접사'라고 하는 효과를 내려고 한 듯하다. 이렇게 인물을 자르는 것은 일반적이지 않은 방법이기 때문에 프랑스 후기 인상파 시대에 이를 둘러싸고 커다란 논란이 있었다. 전통적인 회화에서 세계가 프레임 안에 갇혀 있었던 반면, 인물을 자르는 기법은 프레임 밖에도 세계가 존재함을 암시한다. 중섭도 이 기법으로 인물을 부각시키면서도 외부 세계를 암시하는 효과를 노린 듯 하다. 그런데 이 그림에 나오는 활 쏘는 남자는 누구인가? 나는 오랫동안 헤라클레스로 여겨왔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은 무엇으로 여기셨는지 궁금하다. 이 그림의 도판을 보여주고 물어보면 많은 분들이 헤라클레스라고 답했다. 우리 머릿속은 도대체 왜 그리스 로마 신화로 가득 차다시피 한 것인가. 다른 그림을 보자. 이 그림에서 활을 쏘고 있는 이 남자는 '예'이다. 예는 인간을 위해
최석태 미술평론가 | 그림의 왼쪽부터 빈 말을 끌고 가는 사람과 그 앞에 흰 말을 탄 사람이 보인다. 흰 말이 고개를 숙이고 멈칫한 사이 말끌기꾼의 시선은 자기 뒤쪽 한무리의 말탄 사람들에게 향해 있다. 맨 앞에 있는 말탄 사람도 시선이 말 달리는 무리에게 향해 있다. 그림의 오른쪽에는 큰 북을 두드리는 두 사람이 보인다. 두 사람의 시선도 그림 중간이 말달리는 무리에게 향해 있다. 이들의 움직임에 맞추어 북을 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전경에 비해 작고 흐릿하게 그려졌으나 이 그림의 중심을 이루는 것은, 모든 등장인물의 시선이 향하는 곳, 바로 말달리는 무리다. 한 손에는 긴 막대가 들려있고, 잘 들여다 보면 붉은 빛의 작은 동그라미 모양을 쫓아 달리는 것임을 알 수있다. 그 뒤로 더욱 옅게 그려진 관중들이 보인다. 그림 제목은 없고 그림의 왼쪽 아래에 그림 그린 사람의 이름과 도장이 찍혀 있다. 이 그림은 경기도 과천 경마장에 딸린 마사박물관 소장품으로, 다음과 같이 그림 위에 빼곡하게 적은 기록과 하나로 되어 있다. 이 그림을 그린 이여성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낯선 인물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독립운동가 내지 사회연구자, 미술사학자로, 특히 요 근래 조
최석태 미술평론가 | 여자들이 무리지어 앉아 있다. 문지방에 팔꿈치를 얹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여인을 맨 앞에 배치하고, 바로 뒤로 두 손으로 무릎을 세워잡은 여인, 무릎 위로 팔을 겯고 그 위에 고개를 묻고 우는듯한 여인 그리고 그 여인의 머리에 손을 대고 담담한 표정으로 곁에 앉은 여인 등, 여러 여자들의 모습이 그림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들의 뒤로 한 남자가 누워있는 모습이 보인다. 발은 퍼렇게 색이 변해있고 흰 바지를 입은 듯 보인다. 가슴을 드러내고 문이 있는 벽으로 얼굴은 조금 가려진 상태다. 남자의 상태로 보아 이것은 죽음을 곧 앞둔 남자를 두고 슬픔에 빠진 여자들의 모습을 그린 것임을 알 수 있다. 여자들이 입은 옷과 머리 매무새 그리고 누운 남자 뒤로 놓인 농으로 보아 당시 조선의 모습을 담은 것이 분명하다. 알파벳으로 이름을 적은 옆에, 서기 연호 뒷자리 두 숫자, 38이라 적은 것으로 1938년에 그린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그림은 일본에서 그려져 일본에서 손꼽히는 공모전에 출품하여 입선을 받은 그림이다. 이런 정보를 알려주는 기록이 담긴 인화사진이 남아있어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전시회가 열리는 날에 참석한 입선자들에게 인
최석태 작가 | 그림 아래쪽에 알몸을 드러내고 누운 여자를 그렸다. 다리를 얌전하게 구부리고 앉은 동물에게 몸을 기대고 누운 상태다. 여자는 얼굴을 돌린 채 눈을 감고 있다. 잠에 빠져든 듯하나 무릎은 올리고 있는 상태이다. 여자와 한 덩어리를 이룬 동물 뒤에는 두 마리의 커다란 새를 배치했다. 둘 다 날개를 편 상태로 그 중 한 마리는 부리가 한껏 벌려져 마치 무슨 소리를 내지르는 것 같다. 여자와 동물들이 이룬 무리 뒤로 길이 이어져 있으나 이내 끊어져 있으며 그 너머는 절벽으로 설정했다. 다소 멀리 있는 듯한 물을 넘어 보이는 산등성이 옆으로 달이 조금 보인다. 입을 벌려 외치는 듯한 새는 바로 그 달을 보면서 여자더러 잠을 깨 일어나 달을 맞으러 가라고 외치는 것 아닐까? 1940년, 25살을 맞은 이중섭이 그 해 전반기에 일본에서 그린 그림이 바로 이 그림이다. 이 그림은 당시 일본의 신예 미술가단체 자유미술가협회(지유미즈츠카교카이)가 영향력을 넓히기 위해 만든 공모전에 출품한 것이다. 이 그림 이름 <망월>은 한자어로, 이중섭이 활동하던 당시 일본에서는 많은 그림 이름을 한자로 적었었다. 우리말로 하면 달맞이, 달보기이다. 앞으로는 이
최석태 미술평론가 | 도대체 어떤 세상이 되었기에 알을 깨고 나오는 병아리를 그리고, 웬 세상이야 라고 외치며, 시원하다고 말하는 것일까? 무엇이 시원하다는 말일까?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은 이도영. 1884년에 태어나 1933년에 돌아간 화가다. 다달이 나오는 정기간행물에 이 그림을 그렸으나, 이 한 장으로 끝나버렸다. 아마 검열로 더 이어지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인쇄되어 나온 이런 그림은 그 동안 미술작품 혹은 예술작품으로 다루어지지 않았다. 지난 2019년에 열린 국립현대미술관 창립 50년 기념 전시, <광장;미술과 사회 1900-2019전>에 출품되었으니 비로소 미술작품으로 대접을 받았다고 해도 무리한 말이 아닐 것이다. 1909년부터 1년 조금 넘어 이어지다가 식민지가 되어 그만 두게 된 그의 만화 작업은, 대한제국의 흔적이라는 것 만으로도 소중한데 더하여 항일 미술 활동으로 거의 독보적인 활동이라고 할 것임에도 광복 60주년 기념으로 국립현대미술관이 개최한 <한국미술 100년전>에 출품되어 처음으로 미술관에 발을 잠시나마 디뎠다. 이제사 비로소 이도영의 만평이나 출판미술이라는 것이 미술관에 등장하게 된 것이다. 쿠텐베르그 혁명
최석태 미술평론가 | 이번에 소개할 그림은 아이가 셋이 있는 엽서그림이다. 언덕인지 바위인지에 앉은 한 녀석은 고개를 올려 앞에 있는 나무인지 하늘을 쳐다보고 있다. 물이 있는 아랫 부분에 있는 녀석들 중 왼쪽 아이는 물고기를 두 손으로 들어 올리고 있다. 오른쪽에 있는 녀석은 오리에 올라타고 있다. 실제로는 이루어지기 힘들지만 그림으로는 흔히 그려진다. 이 녀석들이 하늘을 쳐다보거나 노는 곳은 연꽃이 핀 못이다. 연꽃 봉오리가 보이고 그 주위에는 아직 펴지지않고 말려진 상태의 연잎이 보인다. 물고기를 잡아든 녀석의 가랑이 사이로도 연 줄기가 보인다. 멀리 산이 둘러져 있고 빈 곳을 메우듯 새 두 마리가 그려져 있다. 이 그림에 보이는 어린이며 연꽃이 있는 못 같은 배경 설정은 이중섭이 창안한 것일까? 세 아이를 등장하게 한 것도 우연일까? 들여다 보면 볼수록, 이런 구성은 고려의 유명한 도자기인 푸른 사기, 즉 청자에 새겨지거나 조각된 것에서 빌려온 것으로 여겨진다. 아래 사진을 보자. 이것은 고려 시대의 청자 접시다. 접시 형태를 만든 뒤, 연꽃이 핀 못에서 노는 세 아이를 돋을새김으로 새겨서 마주보게 배치하였다. 이중섭이 그림으로 펼친 장면과, 등장인물
최석태 미술평론가 | 앞에서 알미늄박지에 긁어 그린 그림 가운데, 전쟁 중 저질러진 양민 학살을 고통스럽게 보여주는 그림을 이미 살펴본 바 있다. 그 그림의 화면 오른쪽에 어머니인지 아내인지 모르겠으나 큰 비중으로 그려진 여자의 얼굴이 있고, 짧고 굵은 선으로 흐르는 눈물을 표현한 것에서 나는 눈을 떼기 어려웠다. (관련기사 이중섭 <눈물>, 원통한 떼죽음을 은박지에) 이렇게 처참한 동족상잔, 골육상쟁을 그린 그림이 또 있다. 아래 그림을 보면, 두 마리의 네발 짐승이 아래위로 그려져 있다. 이들의 꼬리는 묶여 있고 짐승의 머리 부분은 사람의 상체로 설정되어 있다. 이들 사람인지 짐승인지 모를 괴물은 손에 망치와 칼을 쥐고 서로 해치려는 것으로 보여 우리를 놀라게 한다. 섬찟한 느낌이다. 이중섭은 서로 해치려는 두 마리의 짐승을 그리면서 그 꼬리가 서로 묶인 것으로 연출함으로써 이들이 처한 상황을 넌지시 보여주고 있다. 이들은 서로를 스스로 묶었는가? 누군가가 강제로 묶었는가? 이들은 왜 한 손에 서로를 해치는 흉기를 들고 휘두르고 있는가? 그런데 이렇게 서로 다른 짐승의 꼬리를 연결하는 발상을 한 그림이 또 있다. 그 그림은 이중섭이 1941년
최석태 미술평론가 | 박수근이 쓴 시가 있다. 정확히 말하면 시조다. 마음없는 붓을 들고 오늘도 오고가고 그림은 더디고 세월은 빠르고나 못오는 청춘이라 허송하기 서러워라 - 마포로에서, 박수근 자신의 모습을 찍은 사진을 인화하면서, 자신이 쓴 시가 곁들여 나오게 한, 특이하다면 특이한 사진이다. 박수근의 굳은 얼굴 표정과 더불어 시의 내용을 읽어 보면 박수근의 남다른 결의를 볼 수 있는 사진이다. 때는 1954년 초 겨울인 듯하다. 이 시기에 박수근은 미군PX에서 미국군 사병들이 주문하는 초상화 따위를 그려주는 일을 하고 있었다. 사진에서 박수근은 '나는 이런 상태를 이제는 이만 그치고 싶다'고 외치고 있다. 일본 강점기 끄트머리 시기에 평안남도 도청 서기로 생활하기를 5년 여, 이어 북한 강원도 김화군 금성여자중학교 미술교사로 다시 5년 여, 도합 10년 좀 더 되는 시기 동안에 개인적으로는 안정되게 지냈다. 그러다가 전쟁이 나서 직장은 물론 집도 잃고 가족과도 헤어졌다가, 다시 조금은 안정을 취하던 때였다. 하지만 휴전으로 전쟁은 그쳤다 해도 아직 폐허속에 살아가던, 이렇다 할 전망을 세우기 힘든 때였다. 그런데 이 사진을 통해 선언 아닌 선언을 한 뒤에
미술평론가 최석태 | 그림 한가운데에는 불이 켜진 초가 그려져 있다. 게가 초를 잡으려 하고 그 주위로 아이로 보이는 세 사람이 팔을 뻗쳐 초를 받치려 하는 것 같다. 초 위쪽으로는 한 남자가 눈을 감고 누워 있다. 한 손에 둥글게 말린 종이를 쥐고 있다. 이로써 누군가를 추모하는 그림의 분위기가 잡혔다. 종이를 말아쥐고 누운 사람의 발치와 머리 근처로 세로줄이 거듭 그어져 있다. 발치의 세로줄을 따라 아래로 가보면 모서리를 만들면서 가로줄과 만난다. 이 세로줄과 가로줄은 경계를 나타내는 걸까? 그러고 보니 촛불이 그려진 장면은 그림이다. 그림임을 알고 보니 직사각형의 선명한 화폭도 눈에 들어온다. 화폭 아래 왼편에는 물감판과 붓이 보인다. 오른편에는 고개를 젖힌 얼굴이 보인다. 화폭의 그림과 약간 겹쳐지긴 했어도, 그가 팔을 뻗어 붓을 쥔 손도 보이다. 누군가의 죽음을 추모하는 그림을 그리고 있는 화가를 그린 것이다. 이 그림은 이중섭이 화가답게 친구인 시인 오장환의 죽음을 추모하여 그린 그림이다. 이 사실은 꽤 오래 전에 많은 사람들이 귀뜸해주었지만 그 당시에는 명확하게 인지하지 못했고, 시인의 이름 석자만 아는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오장환 시인은
최석태 미술평론가 | 지금으로부터 100년도 더 된 1906년 7월 17일, 당시 최고 최대 일간지이던 대한매일신보는 첫쪽 머릿 부분에 <혈죽기>라는 글을 실었다. 한문으로 된 이 글의 시작 부분과 마지막 부분을 현대어로 옮겨보자. 아, 이 대나무는 민충정공의 피로구나. 공의 피 묻은 옷과 피 묻은 칼을 침실 뒤 협방에 두고 그 문을 잠근 채 250일쯤 지났더라. 하루는 그 집 사람이 문을 열고 보니 대나무 네 줄기가 마루 틈에서 솟아 자라 있더라. 첫째 줄기는 길이가 3척이 고, 둘째 줄기는 2척, 셋째 줄기는 1척이고, 넷째 줄기는 반척 쯤이니, 모두 네 줄 기 아홉 가지에 41잎이 달렸더라.(---) 공이 유서를 남겨 우리 동포를 깨우쳐 말하기를 나는 죽지만 즉는 것이 아니고, 저승에서 여러분을 돕고자 기약한다고 했으니 어찌 미덥지 않으리오. 생각컨대 우리 이천만 동포 한 사람 한 사람이 이 대나무에 대해서 듣고, 대나무를 보고, 대나무를 가슴에 삭여, 그 충군애국의 혈성血誠을 배양하면, 어찌 독립을 다시 회복하지 못함을 걱정하리오. 아아, 이 일을 힘써야 하리로다. - 겸곡 생 그리고는 같은 날 신문의 끝쪽인 4쪽 전체를 대나무 그림으로 채